(올드스톤의 살며 사랑하며) 아들을 군대에 보내고 나서

20171128

어제 저녁에 아들놈 군대에 보낸다는 포스팅에 댓글을 많이 달아주셨습니다. 하루종일 댓글을 달 형편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여러분들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하나하나 댓글에 답을 해야 하겠지만 포스팅 모두에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합니다. 다시 한번 감시드립니다.

하루종일 바빴다. 내색은 하지 않지만 마음은 복잡한 마음이다. 아침에 어머니를 모시고 같이 길을 나섰다. 고속도로 중간 휴게소에서 아들놈은 무슨 핫도그라는 것을 시켜 먹는다. 논산주변에는 먹을 만한 식당이 없다고 하면서 말이다.

마침내 논산훈련소 정문앞에 도착했다. 상인들이 여기저기서 호객을 한다. 우리도 낚여서 식당에 들어갔다. 낡은 시골 식당이다. 불낙전골을 시켰다. 논산 훈련소 앞에는 맛집 같은 것이 없다고 한다. 하기야 아무리 맛이 있는 음식이라도 훈련소 입소하는 놈들이 무슨 맛이 있겠는가? 먹는 것 좋아하는 나도 세상에서 가장 맛없는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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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하고 있자니 여자 아이가 입영하는 것 같은 남자 아이에게 안겨서 온다. 아빠란다. 애가 애를 낳았다. 애기 아빠가 군대에 가는 모양이다. 아들놈에게 너보다 더 한심한 놈이 있다했더니 웃는다. 삶이란 다 자기만의 무게가 있고 자리가 있다. 모두들 군대에 가도 같은 군대가 아니다. 자기가 처한 상황에 따라 군대는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34년전이다. 우리 소대에 신병이 들어왔다. 중학교도 마치지 못했는데 자원입대했다고 한다. 시골에서 어른들이 사람되려면 군대에 가야한다고 해서 왔단다. 그 아이는 글씨를 쓰지도 읽지도 못했다. 그래도 마음은 무지하게 착해서 소대 고참들이 이뻐했다. 소대에 서울대다니던 고참이 하나 있었다. 편지를 써주고 읽어주었다. 편지를 쓰는데 들어보니 우스웠다. “어머니 아버지 안녕하십니까? 소들은 잘 있는지요” 라고 시작했다. 중학교 다시면서 혼자서 소를 키웠는데 군대오기전에 6마리까지 늘려 놓았단다. 그 아이는 저녁이면 소가 보고 싶다고 훌쩍 거렸다. 처음에는 그저 우습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어림풋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아이에게 소는 내가 생각하는 소가 아니었다. 모두 다 같은 것 같지만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뛰어 다니는 갓 돌지난 계집아이와 그 계집아이하고 비슷하게 생긴 어린 아내를 남겨놓고 군대에 가는 그의 마음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식사를 하고 나와서 입소하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여기서 1km를 더 가야 한단다. 그럴 것 같으면 이 사람들은 왜 여기서 우리를 잡았나? 난 훈련소 정문에서 상인들이 서 있기에 입소하는 장소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줄 알았다. 젠장 우리는 호구가 된 것이었다. 언제 호구를 면하나? 평생 살면서 난 호구신세를 면해본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인간이란 이용하는 인간과 이용당하는 인간으로 나뉜다. 난 이용당하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매번 이용하는 인간들을 저주하고 멸시하지만 결국 이용당하는 인간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

그래도 아들 군대보내는 날까지 호구노릇을 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에 스스로 나를 달래면서 입영심사대라고 하는 곳으로 갔다. 차를 주차시키고 길을 건너 입영심사대 정문으로 갔다. 사람들이 벌써 많이 모여 있었다. 2시에 입소라고 한다. 정문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다. 아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 그리고 친구들이 북적 북적하다. 이쁘게 차려입은 여자친구들이 남자친구 팔을 끼고 입영심사대로 들어간다.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움직이기도 어렵다. 조금 가다보니 모두들 서 있다. 잠시 기다려서 2시가 되니 그냥 안으로 들어간다. 입영행사 같은 것도 한다고 하더니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입영행사하는 곳에 공사를 해서 그냥 입대한단다. 우리는 조금 높을 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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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가되어 아이들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아들놈이 “나 이제간다”그러더니 제 애미와 할머니를 포옹한다. 그리고 나를 안는다. 이제 나보다 더 커버린 아들. 가슴팍도 더 넓어졌다. 순간 그 아이 눈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난 “잘해라”했다. 더 말을 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주변에서 흑흑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큰 길을 따라 쑥 들어가버린다. 5분도 지나지 않아 그 많던 아이들이 거의 다 들어가버렸다. 그제서야 나와 같은 애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애비들 눈이 벌겆다. 그중 50대 중반의 구릿빛 얼굴을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이 벌겆게 충혈되어 있었다.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 나도 안다. 그의 가슴 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흐르고 있는 것을. 여기저기 사내들의 얼굴을 보았다. 다들 가슴에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빠져 나갈때까지 그냥 서 있었다. 길가 바로옆에 커피샵이 있었다. 아마도 면회소인 것 같았다. 우리는 어머니와 애 엄마 그리고 나는 커피샵에 들어가서 멀리서 애들이 어찌하나 보았다. 한참을 서 있더니 줄을 서서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향했다. 오는 길도 멀었다. 집에 들어왔다. 그놈의 큰 신발이 현관 한쪽 구석에 놓여 있었다. 올겨울 내내 신고 다니던 신발이다. 주인은 어디가고 신발만 남았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아들놈 방에 들어갔다. 방은 어질러저 있었다. 평생 정리를 할 줄 모느는 놈이 군대가서 좀 달라져서 오려나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아들놈 자리에 누워 잠을 청했다. 마치 아들놈이 누워 있듯이 나도 그렇게 누워 있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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