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살며 사랑하며) 세상 사는 법, 순간에 몰입하는 것.

20171101Screenshot_20170625-233051.jpg

11월이 되었다. 시간은 정말 빠르다. 올해초 2017년이라는 숫자가 어색하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마지막을 향해 달리고 있다. 삶이란 그저 지나치는 섬광과 같다고 하던 말이 실감난다. 살면서 많은 고민을 하지만 그것 마저도 아주 짧은 순간에 불과하다. 그렇다. 삶은 순간이다. 우리는 순간을 살고 있을 뿐이다.

간혹 젊은 친구들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상담 아닌 상담을 하게 된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미래가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젊을 때, 미래는 훤하게 보였다. 무엇을 하든 열심히만 하면 잘 될 수 있었다.

성실과 근면이라는 것은 성공을 위한 최대의 덕목이었다. 밤을 지새우고 별을 친구삼아서 일을 하면 뭔가 이루어지는 것. 우리가 살아온 것이 바로 그런 삶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다른 듯 하다. 비교적 전문적인 영역에 들어가 있는 친구들 조차 자신의 진로에 고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의외로 그런 친구들이 고민을 토로한다. 그정도 되면 그냥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라는 것이 문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근심에 가득차 있는 듯하다. 그렇다. 과거와 달리 앞으로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그 누구도 자신있게 앞으로 세상은 이렇게 될 터이니 이렇게 살면된다고 말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우리가 장미빛 미래를 살아온 것과 달리 앞으로의 세대는 암울한 미래를 헤쳐나가야 하는 것 같이다.

과학기술의 발달은 우리의 예상과 달리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부의 집중을 초래했다. 생산력의 독점이 초래한 상황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측면에서 마르크스의 통찰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삶의 본질은 불확실과 혼돈이다. 누구도 삶을 계획하고 살수 없다. 삶이란 불연속적이고 비선형적이다. 지금의 젊은이들보다 훨씬 좋은 여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살아온 삶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미리 계획하고 살수는 없는 법이다.

나만 해도 그랬던 것 같다. 하루하루 하다보니 오늘날의 모습이 되어 버렸다. 오늘을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적분이 삶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루하루를 자세히 들어다 보면 연속적이고 선형적이지 않은 것 같다. 삶은 하루하루의 삶이 모여서 이루어지지만 그 하루하루가 연속적으로 그리고 선형적으로 원인과 결과를 만들어 내지는 않는 것 같다.

살아온 삶을 되돌아 보면 내가 어떻게 하다 여기까지 오게되었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삶이라는 것은 순간의 선택이 적분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기서 순간이라는 것은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바로 결정의 순간을 의미한다. 삶이 불연속적이고 비선형적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유다.

그래서 이야기 한다. 앞으로 미래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청사진 같은 것 그릴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결정의 순간이 적분되어서 이루어지는 것이 삶인데 그 결정의 순간을 미리 계획할 수는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그냥 내 앞에 직면한 것에 최선을 다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직면한 상황과 현실에 최선을 다해서 임하는 것. 거기에 몰입하는 것 이외에는 어떠한 해결책도 없다는 것이다. 그 몰입의 과정이 결국은 쌓이고 쌓이는 것이 삶이라는 총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다.

삶은 시간의 적분이 아니다. 내가 집중한 몰입의 적분이다. 내가 몰입하지 않으면 적분된 삶의 양도 많지 않을 수 밖에 없다.

우리가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걱정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앞에서 필자가 말한 불확실하고 어두운 미래도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걱정한다고 해서 어두운 미래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두운 미래가 바뀔 수 없는 것은 혁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혁명은 현실의 모순을 고치기 위해서 발생한다. 미래의 모순을 고치기 위해서 현재를 혁명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냥 부딪치는 수 밖에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그런 삶은 살고 있고 살아왔다. 앞으로의 미래도 현실에 내가 얼마나 충실하느냐에 따라 방향이 바뀔 수 있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불교에서 지금 이순간을 잘 살아라고 하는 가르침이 생각난다.
내가 아무리 고민했다고 하더라도 결국 부처님 손바닥안이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살며 사랑하며) 세상 사는 법, 순간에 몰입하는 것.’

(steepshot) We ate it up completely

https://steepshot.org/api/v1/image/51bce879-3fb9-4c01-84ca-e4f89299dc50.jpeg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steepshot) We ate it up completely ‘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고영태의 가석방을 보면서, 그 때 왜 잡아 넣었을까?

20171031

Screenshot_20170625-233051.jpg

며칠전에 고영태가 가석방되었다. 1년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최순실 청문회의 스타였다. 고영태를 위시한 몇몇의 증언이 아니었다면 최순실 문제는 그냥 수면하게 잠겨있었을 것이고 그녀는 여전히 권세를 부리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만일 지금도 여전히 그녀가 건재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생각으로 살고 있을까? 생각만 해도 아득하다.

민주주의가 되면서 세상을 바꾸는 것은 엄청나게 잘난 사람들이 아닌 것 같다. 그저 이름없는 소시민들의 의지가 하나하나를 변화시키고 역사의 물골을 바꾸어 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작년의 촛불혁명도 결국 작은 한 사람 한 사람이 만들어낸 커다란 역사의 물골이었다. 그 물골을 만드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고영태였다.

고영태는 박근혜의 탄핵이 결정되자마자 얼마 있지 않아 구속이 되었다. 관세청장 인사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고영태의 구속과정은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관세청장 인사에 개입하고 돈을 받았다는 것이다. 검찰이 고영태가 관세청장 인사에 개입해서 돈을 받았다는 것을 언제쯤 알았을까? 그리고 왜 구속을 시켰을까?

죄를 지었으며 조사를 해서 재판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고영태의 경우 그렇게 당연하게 여겨지는 법질서의 집행이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것은 웬일일까?

고영태의 구속을 보면서 검찰의 일부에서 보복으로 구속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최순실 게이트로 가장 크게 피해를 보았던 집단이 우병우를 위시한 검찰 수뇌부였다. 필자는 그들이 보복으로 고영태를 구속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을 했었다.

고영태의 구속과정에 문제를 제기한 언론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고영태가 범죄를 저질렀다고 해서 박근혜 탄핵이 끝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구속을 시켰어야 했을까? 누구든지 절대선은 없다. 더 큰 악을 위해 작은 악을 이용하는 것이 통상적이다. 상식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검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적어도 박근혜와 최순실의 재판이 종료되는 상황까지는 증인 보호 차원에서 고영태를 보호해주어야 하는 것일 것이다.

검찰은 증인을 구치소에 잡아 넣고 보호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희생에는 댓가가 따라야 한다. 고영태는 별의 별 소문이 다 돌았던 사람이다. 그런 이상한 소문 때문에 혐오스럽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녀를 중심으로 한 거악을 척결하는데 가장 앞장 섰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보호해주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사회에는 그 누가 고영태처럼 나와서 정의를 부르짓을 수 있을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고영태를 위시한 몇몇의 헌신과 희생에 빚을 지고 있다. 아닌가?

고영태가 잡혀들어갈 때 우리 모두는 침묵했다. 돌이켜보니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국민적으로 보호를 위한 시위라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미국은 증언을 하면 죄를 사해주는 프로그램도 있다고 한다.

죄가 있으면 잡아가야 한다고?
무엇이 정의일까?

거악을 척결하기 위해 어느 정도는 넘어가는 것이 훨씬 정의롭지 않을까?
고영태를 그렇게 잡아넣은 것은 일종의 보복이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고영태의 가석방을 보면서, 그 때 왜 잡아 넣었을까?’

what I ate in this weekend in Wonjoo

https://steepshot.org/api/v1/image/9b0c284a-f5d7-49cf-88b4-d5bb4dfe6252.jpeg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what I ate in this weekend in Wonjoo’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정치인의 신의와 이상돈, 그리고 안철수가 망한 이유

20171030

Screenshot_20170625-233051.jpg

안철수는 이미 한물간 정치인 취급을 받는 듯하다. 지금의 정치인 중에서 젊은 축에 속하는 데도 불구하고 그런 취급을 받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정치인으로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능력은 무엇일까? 비전을 보여주는 능력,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헌신하도록 하는 능력이 바로 그것일 것이다.

며칠전 TV를 보다가 이상돈이 인터뷰에서 안철수보고 꺼진불도 못되는 꺼진 재라고 했다. 그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정치인으로서도 그렇고 보통 사람으로서도 그렇고 할 이야기와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는데 그는 그 선을 넘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준 사람은 안철수다. 이상돈은 안철수가 데리고와서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을 한사람이다. 즉 안철수의 핵심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돈이 한 말의 수위는 안철수와 결별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서로 다른 길을 가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정적사이에나 할 수 있는 말이다. 그것은 배신이다.

이상돈이 그 정도 말을 하려면 전제조건이 있다. 적어도 안철수에게 받는것은 내놓아야한다. 비례대표 국회의원직은 사퇴하고 나서 그정도 이야기가 진정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안철수는 이상돈이 동생과 지저분한 재산분쟁은 물론 공인으로 여려가지 결격사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례대표 의원으로 지목을 했다.

안철수는 이상돈이 훌륭해서 비례대료로 지목했을까?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돈도 그런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왜 이상돈이 그런 말을 했을까? 안철수가 정말 능력이 없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타산이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안철수가 비전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상돈이 하는 정도의 방법으로 비난을 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자기가 소속된 정당의 대표를 그런식으로 비판하는 것은 통상의 수준을 초월한다.

그렇다면 이상돈은 안철수에 대한 비난과 비판을 통해 무엇인가 반대급부를 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간은 어떤 경우에 변하는가? 의리 때문인가 아니면 이익 때문인가? 의리를 생각하는 사람은 변하지 않으며 이익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변한다.

이상돈이 안철수의 후견인 혹은 멘토라는 입장에 있다가 지금처럼 비난하는 입장으로 돌아서는 것은 당연히 이익 때문일 것이다. 이상돈이 생각하는 이익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비레대표 정치인으로서의 이익이라는 것은 뻔 하다. 그러나 그런 이익을 이야기하는 것도 치졸한 것이니 여기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 않다.

문제는 이상돈은 정치인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안철수가 망한 이유를 단 한가지를 들라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이상돈 처럼 심지가 없고 의리가 없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었으니 어찌 성공할 수 있었겠는가? 성공하는 정치인과 실패하는 정치인은 주변에 의리가 있는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듯 하다.

원래 자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안철수가 직접 뽑은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하는 것은 문제다. 그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안철수가 대통령 선거에서 지는 것은 물론이고 지금의 정치지형에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안철수는 국민들이 이상돈같은 사람을 보고 있게한 책임이 있다.

두사람 모두 지금의 상황에 책임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신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은 옳지 않다.
신의를 버리는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를 꼭보여주어야 우리 사회가 올바르게 갈 것이다.

이상돈이 안철수를 비난한 것은 안철수가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와 의리의 문제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횡설수설) 정치인의 신의와 이상돈, 그리고 안철수가 망한 이유’

(올드스톤의 안보칼럼) 미국방장관의 매티스 방한 뉴스를 보면서, 양날의 칼

20171029

Screenshot_20170625-233051.jpg

불과 얼마전이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느니 마느니 하던때까 말이다. 요즘은 뉴스나 신문에 전쟁에 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배낭같은 것들이 매진되었다고 한다. 언론에서 말을 하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먼지 모르는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북한핵과 관련한 뉴스가 몇가지 있었다. 대부분 군사적 옵션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말로는 대화와 외교를 말하면서 군사적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 얼마 있지 않아 한반도 주변에 항공모함 3척이 들어온다고 한다. F-22와 F-35가 전진배치된다는 소리가 들린다.

한편으로는 매티스 미국방장관이 방한해서 자신의 목적은 전쟁이 아니라 한반도비핵화가 목적이라고 이야기 했다. 미국 의회에서는 대통령이 북한에 대해 전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고 한다. 미국의 조야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홧김에 북한을 때릴까봐 전전긍긍하는 형국이다. 오늘 아침 뉴스에는 미의회조사단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며칠 만에 30만명이 사망한다는 이야기가 보도되었다.

미국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보여줄 수 있는 정보들은 매우 혼란스럽다. 전쟁을 할 수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기야 자신이 무엇을 하려는지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은 협상력을 떨어 뜨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렇고 보면 현재의 상황은 미국이 가장 바라고 있는 상황인지도 모른다.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자신을 먼저 속이는 법이다. 만일 미국이 군사적 옵션을 위협하면서 대화를 하려고 하면 군사적 옵션이 진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상대방이 믿어야 한다. 상대방이 믿을 수 있도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편들도 그렇게 믿어야 한다. 미국 의회에서 트럼프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트럼프 입장에서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한국과 일본이 전쟁이 일어날 수 도 있다는 것을 믿도록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으로 어떻게 할까? 앞으로 하루하루가 매우 중요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방장관 매티스가 자신의 목적이 전쟁이 아닌 한반도 비핵화라고 했다는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물론 이말도 양날의 칼과 같이 정반대로 해석될 수 있다.

만일 미국이 북한에 대한 전쟁을 진짜로 고려하고 있다면 미국방장관 매티스가 이런 유화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지금 당장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뒤로는 전쟁준비를 완벽하게 갖추려고 하는 책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북한에게 지금 당장 대화로 나와라고 하는 권고이다.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좋을까?

안보를 생각한다면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최악의 상황을 고려하고 대비하는 것이 안보이기 때문이다.

일전에 매티스가 군사적 옵션의 가능성을 준비하면서 미군 장교들에게 페렌바흐의 This Kinds of War를 읽어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필자도 찾아보았다. 1960년대 초반에 출판된 이책은 우리나라에서도 실록한국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된 적이 있었다.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조차 어려웠다. 직원에게 부탁해서 겨우 찾아보았다. 아직 1장정도 밖에 보지 못했다.

그동안 읽었던 주요 내용 중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미국 국무부의 상황오판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는 평가였다. 반면 미 국방부는 소련의 의도를 정확하게 평가했다는 것이다.

앞부분을 읽으면서 매티스가 이런 부분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매티스는 왜 미군장교들에게 이미 잊혀진 페렌바흐의 한국전쟁 저서를 읽으라고 했을까?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상황을 보아서 미국이 막을 수 있었던 전쟁을 막지 못했던 것을 이르는 말일까? 혹시 그는 지금 북한을 막지 못하면 미국이 또 다시 어려움에 빠져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북한과의 불확실한 현상유지가 바로 제2의 에치슨라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일요일 오전 홀로 앉아 있자니 이런 저런 상념이 떠 오른다. 만일 전쟁이 목전에 와 있다면 우리나라 정치지도자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안보칼럼) 미국방장관의 매티스 방한 뉴스를 보면서, 양날의 칼’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