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보 김기창과 이중섭, 기억과 망각의 사이에서

일전에 어머니를 모시고 운보의 집에 다녀왔습니다. 운보 김기창은 벙어리 화가로 잘 알려졌습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라고 하지요. 팜플렛을 보니 세계에서 가장 큰 개인 기념관이라 합니다.

어머니께서 그림을 그리시기 때문에 시간을 내어서 운보의 집을 들렀습니다. 운보읭 집은 너무나도 화려했습니다. 화가의 집이라기 보다는 엄청난 권력자의 집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가 @slowwalker 계정으로 네번이상이나 포스팅할 정도였습니다.

운보의 집을 갔다 와서 이리 저리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갑자기 6.25 전쟁이후인 1956년 죽은 화가 이중섭이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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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의 집 전시관에 걸려있는 소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운보는 소와 말을 즐겨 그렸다고 합니다. 제가 본 것은 운보의 소그림 때문입니다.

갑자기 운보의 소싸움 그림을 보면서 이중섭의 소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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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보 김기창은 동양화가 이지만 이중섭은 서양화가 입니다. 두사람 모두 소를 즐겨 그렸다지만 가만 보면 차이가 많이 있습니다. 가장 큰 차이는 운보는 여러마리의 소를 그렸습니다. 말도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나 이중섭은 소를 한마리만 그렸습니다. 하나와 여럿. 별것 아닌 것 같아도 아마 두사람의 차이를 확연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중섭은 소한마리에 집중을 한 듯합니다. 왜 그는 한마리를 그렸을까요? 저는 그가 항상 혼자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일본으로 보내고 혼자서 한국전쟁의 험난한 시기를 넘겼습니다. 그가 사랑했던 아내는 일본인이었습니다. 해방이 되고 아내는 아이들과 일본으로 넘어갔고 이중섭은 이곳에 남았습니다. 당시에 일본으로 넘어가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세상사는 것에 서툴었던 이중섭은 시대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지요. 그가 그린 소는 자신의 자화상이 아닐까요. 그저 큰 눈만 껌벅껌벅할 뿐 당체 어찌할 방도가 없는 소를 자신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요? 이중섭의 소는 김기창의 소와 다릅니다. 사람들은 이중섭의 소를 힘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중섭이 소의 힘을 강조한 것이 아닌 듯합니다. 그는 굵은 선으로 비쩍 마른 자신의 육신과 말라가는 정신을 표현한 듯 합니다.

김기창은 평생 영광을 누리던 사람입니다. 항상 주변에 사람이 있었고 외로울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즐겨 그린 소와 말이 여러마리인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제가 너무 주관적으로 해석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요즘 스티밋에 심리학을 공부한 스티밋 동지들도 여러분이 계시니 한번 분석을 받아 봄직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이중섭을 떠올린 것은 작품 때문은 아닙니다. 화가로서 한사람은 평생 부유하고 영예롭게 살았지만 한사람은 평생을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고통받았기 때문입니다. 한사람은 천수를 누렸고 다른 한사람은 제명을 다 마치지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중섭을 떠올린 것은 두사람의 운명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이중섭은 아주 어렵게 살았습니다. 해방이후 가족과 헤어진 이중섭은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살다가 가난 속에서 거의 굶어 죽다 시피했습니다. 굶어 죽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김기창은 시류에 영합하는 재주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시대에는 천황의 초상화을 여러번 그렸습니다. 그래서 친일화가라는 딱지도 붙어있었습니다.
반면 이중섭은 육신이 멀쩡했지만 세상사는 재주는 영 점병이었습니다.

운보의 집에 다녀와서 한동안 김기창과 이중섭을 생각했습니다. 운보의 집 안내 팜플렛에 김기창을 단원 김홍도와 혜원의 뒤를 잇는 사람이라고 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기창의 그림을 보고나서 저는 앞으로 운보라는 이름이 그리 오래 가지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그림을 잘 모릅니다. 그런데 왜 제가 그런 생각을 하게되었을까요? 저는 예술이라는 것은 모름지기 치열한 문제의식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열한 문제의식과 삶에서 예술 혼이 나오는 것이지요. 그림을 잘 모르지만 운보의 그림에서 치열한 느낌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이중섭에 대해서는 다른 설명이 없겠지요. 그는 6.25 전쟁이라는 시대적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 내었습니다. 인간적인 고뇌도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운보의 집에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커다란 돌에 김기창은 자신이 들을 수 없는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고 하더군요. 그런 고통이 이중섭이 당한 고통에 만분의 일이라도 될까요? 고통의 크기가 예술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고통없이 예술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중섭의 고통은 자신과 전혀 상관없이 시대가 강요한 아픔이자 고통이었습니다.

앞으로 대한민국이 존재하는 한 이중섭의 이름은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김기창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의 그림에서 영혼의 울림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가 예술적 감각이 부족해서 그럴까요. 아마도 김기창이 친일화가라는 것 때문에 제가 지나치게 폄하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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