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화엄사의 장독대를 보면서

자료를 찾다 보니 화엄사 일주문이 훨씬 앞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내가 포스팅한 일주문이라는 것이 불이문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차를 타고 다니면서 왜 일주문을 보지 못했는지 모르겠다. 혼자 다니다보니 그런가 보다. 그런데 불이문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불이문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원래 불이문이나 해탈문이라고 쓴다. 그런데 지리산 화엄사라고 써 놓았다. 아마 지금의 일주문은 최근에 조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는 일주문이 그 앞에 없었는데 새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그리고서 과거의 일주문을 불이문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만일 새로 일주문을 만들어 놓았다면 괜한 일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냥 그대로 두어도 파격의 미가 있고 또 나름의 의미가 있는 법인데 말이다. 남들이 하니 나도 같이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불교는 원래 개성의 종교라고 생각해왔다.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그래서 각각의 개성을 인정해주는 것이 멋이 있는 법이다. 남들이 한다고 다 똑같이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천왕문을 지나서 바로 왼쪽에 상왕문이라는 이름의 문이 있다. 코끼리 왕의 문이라는 뜻인데 그게 무엇을 의미할까 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채가 나온다. 그리고 그 옆에 장독대가 있다. 그리 많지 않은 장독대가 놓여 있다. 장독대를 보면서 우리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마침 지리산 반대편에서 절일을 도와주고 있는 친구와 통화를 했다. 김장을 한단다. 800포기 정도를 담근단다.

삶은 무엇을 이루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주어진 삶을 살아 내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래서 매일매일 매시간 매시간 살아가는 순간이 중요하다. 장독대를 보면서 삶이란 시간의 흐름을 간직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이 무료한 것이었다. 그냥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면서 나를 온전하게 즐기지 못했다. 지금도 그렇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속에서 평생을 보낸 듯 하다. 그냥 온전하게 흘러가는 시간에 나를 맡기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무료하지 않고 편안한 것이 도의 경지가 아닐까 ? 당연히 그냥 조용히 앉아 있어도 시간의 숙성과정을 거치게 될 것이다. 마치 장독대에서 익어가는 장처럼 말이다.

_A270538.JPG

_A270539.JPG

장독대를 돌아가니 스님들 거처가 나온다. 한 스님이 빨래를 걸고 계신다. 따뜻한 햇볕에 이불이며 두터운 옷들을 햇볕에 말리고 있는 것이다. 스님 거처를 슬쩍 엿보았다. 한칸 정도 되는 방에 책 몇권정도만 있고 아무것도 없다. 벽에난 창문으로 햇볕이 보석처럼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스님은 거기에서 소제를 하고 있었다. 단순하다. 나도 그렇게 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많고 복잡한 화엄사의 구석에서도 시간은 느리게 가고 있었다. 삶을 빨리 살것인가 느리게 살것인가를 결정하는 것도 온전히 나의 몫이란 생각을 하면서 화엄사 경내로 들어섰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화엄사의 장독대를 보면서’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