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스톤의 느끼는 산사 이야기) 군위 인각사를 찾아서, 삼층석탑과 일연스님의 탑비

극락전 앞에 삼층석탑이 놓여있다. 그 모습만 보아도 신라시대의 삼층석탑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상하게 고려시대에 들어오면서 석탑의 각층 비율이 조금 달라진다. 1층보다 2층의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신라시대 석탑의 비율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왜 그런 비율의 차이가 발생했는지 알 수 없다. 세상에 이유없는 일은 없다. 신라시대의 탑이 매우 안정적이고 완벽한 비율을 보이고 있다면 고려시대 탑은 뭔지 모르게 안정적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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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이유라고는 삼국시대의 탑들은 너무 완벽한 비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시대에는 그 완벽함을 피하려고 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지 않으면 고려시대에 지방의 절을 지었던 지방 호족들이 중앙의 고려왕권의 견제를 피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극락전 앞에 서 있는 삼층석탑이 적어도 고려 전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는 이야기는 신라시대에 지어졌던 인각사가 고려전기 이전에 이미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인각사는 신라의 양식인 1금당 2석탑 양식을 하고 있지도 않다는 사실은 이미 삼층석탑이 세워지기 이전에 모두 파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각사는 크게 두번정도 파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번은 고려가 들어서기 전이고 한번은 임진왜란 때이다.

삼층석탑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마당 건너편에 있는 일연선사 탑비쪽으로 갔다. 아마 인각사에서 가장 중요한 유물은 일연선사 탑비인지도 모른다. 가서 보니 검은 돌 두쪽이 서 있었다. 원래 고려시대 충렬왕때 만들어진 비라고 한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탑비가 모두 부서진 모양이었다. 비석은 검은 돌로 만들어져 있었다. 돌의 재질이 약해서 쉽게 훼손되었다. 임진왜란때 왜군들이 많이 함부로 탁본을 해서 많이 훼손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탑비는 왕희지체로 씌여져 있어서 서예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귀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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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표면에 있는 글자는 거의 읽을 수 없었다. 아쉬웠다. 다행히 과거에 탑비를 탁본해 놓은 것이 어딘가에 남아 있다고 하니 아쉬음을 조금 달래본다. 유감스러운 것은 이미 부서질대로 부서진 탑비가 여전히 밖에 놓여져 있어서 비바람의 풍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다녀보면 그런 곳이 너무나 많다. 아직 우리는 조상님의 유물을 제대로 관리하는 정도까지 여유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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