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채사장.
지대넓얕1,2편, 시민의 교양에 이어 이 책에서도 저자 소개는 동일한 걸 사용하고 있다.
좀 색다르게 할 만도 한데.
채사장이 쓴 책을 읽다보면, 이 사람의 인문학적 소양과 글쓰는 능력. 참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앞서 출간한 책들과 달리, 이 책에서는 채사장 자신의 얘기가 많이 담겨있다.
이전의 ‘지대넓얕’과 ‘시민의 교양’을 읽으며, 채사장이란 사람에 대해 은근 궁금했었는데,
딱 이 책은 채사장 본인이 살아온 얘기를 접목해서 글을 썼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채사장의 학창시절은 군대로 얘기하면 좀 관심사병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외모는 전혀 꾸미지 않고, 내면에 대한 관심만 있는..
20대 초반에 종교와 구원에 대한 답을 찾아 고민하고.. 철학을..
복잡한 생각에 머릿속이 맑아지면 돌아오겠다는 다짐으로,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 한권 들고 홀로 무작정 며칠간 동해지역 여행을 다녔다고 한다.
채사장은 대학시절, 3년 가까이 도서관에서 보낸다. 하루에 한 권 정도를 읽는다.
평범하게 대학졸업하고 책읽고 글쓰며 현재까지 온 사람인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시절을 보냈다.
학사장교로 3년이상 군생활, 작은 회사에 취업해서 일도 해보고, 의류/화장품 관련 창업도 해보고, 노량진에서 학생들도 가르쳐보고, 전업 주식투자자 생활도 해보고, 부동산 투자에 대한 공부도 해봤다고 한다.
그렇게 직장생활을 하다가, 여러명의 목숨을 앗아간 큰 교통사고에서 운좋게 자신은 살아남았고 이후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 2학기까지 책 한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학교 성적은 하위권. 공부에 관심도 없는 학생.
정말 의외다.
그러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책 한 권 읽어보자고 생각해서 집에 있는 책 중 하나 고른 것이 ‘죄와 벌’ 방학기간 보름에 걸쳐 마지막장을 덮는다.
이 책 열한 계단이 말하는 단계는 아래와 같다.
- 문학 - 죄와 벌
- 기독교 - 신약성서
- 불교 - 붓다
- 철학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과학 - 우주
- 이상 - 체 게바라
- 현실 - 공산당 선언
- 삶 - 메르세데스 소사
- 죽음 - 티벳 사자의 서
- 나 - 우파니샤드
- 초월 - 경계를 넘어서
아래부터는 책 본문을 읽으며 기록해 둔 문장들.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에 따르면 그리스도교의 도덕성은 원한과 증오에서 출발한 노예의 도덕에 기반을 둔다.
노예들 자신에게 강요되었던 덕목들의 가치는 변신한다.
나약함의 상징이었던 순종과 복종 그리고 겸손과 절제는 이제 선한 자의 덕목으로 그 가치가 상승하는 것이다.
붓다는 기원전 6세기 히말라야 산기슭의 작은 나라 샤키야족의 왕자로 태어났다.
‘붓다’라는 명칭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일반명사로, 깨달음을 얻은 자들을 통칭해서 부르는 말이다.
붓다는 ‘석가모니’라고도 부르는데, 이 말은 ‘샤키야족의 성자’라는 뜻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실존했던 인물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에 고대 페르시아에서 조로아스터교를 창시한 예언가이다.
영어로는 조로아스터(Zoroaster), 독일어로 차라투스트라(Zarathustra)가 된다. 조로아스터교는 유일신 ‘아후라 마즈다’를 믿는 종교.
선택한 모든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잘 읽히지 않는 책이면 고민하지 않고 옆으로 제쳐두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그럼 굳이 읽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잘 읽히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거나, 반대로 그 책이 나를 설득할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의 흥미를 끌고 당신을 깨우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
읽히지 않는 책을 가볍게 지나치지 못하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회, 국가, 종교, 가정, 학교, 직장이 요구하는 의무와 평가에 저항해야 한다.
그들이 당신에게 전문성을 강요하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로만 당신을 평가하려 한다고 해서 그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그것이 전부인양 맹목적으로 살아가서는 안 된다.
사회와 국가는 당신의 영혼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사회와 국가는 오직 당신의 노동력에만 관심을 기울인다.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당신은 노동자로 살기 위해 이곳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전문성의 요구에 저항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노동자가 아니라 나 자신으로, 국가와 사회가 규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규정해나가는 주체적인 존재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당신이 먼저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당신이 주체적인 존재로 일어설 때, 당신의 자녀도, 가족과 친구도 부러뜨린 다리를 일으키고 꺾었던 날개를 힘차게 펼칠 것이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에 따르면, 임금에 대한 관점을 바꿀 필요가 있다.
나의 월급이란 내 노동의 대가가 아니다.
월급은 내가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으로서 부르주아의 이익을 위해 제공된 것이다.
우리가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고 같은 책을 읽고 같은 이야기를 듣지만, 사실은 다른 영화, 다른 책, 다른 이야기를 봅니다.
그것은 각자가 가진 삶에서의 체험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체험한 만큼의 시야 안에서 세상으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내 시야의 경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실제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자기 시야의 경계를 한번 보십시요.
경계가 보이시나요?
아무리 눈을 이리저리 돌려보아도 내 시야의 한계를 볼 수 없으며 그것이 전혀 답답하지도 않습니다.
누구도 자기 뒤통수를 볼 수 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답답해하지 않죠.
우리가 시야의 경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의 시야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어디까지를 이해하는지 그 경계가 보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자신의 제한된 이해만으로도 만족스럽게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2020.01.19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독서일기] 열한 계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