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르크에서 가우디까지 @raah의 스페인 Hi story 건축, 수채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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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리크가 지브롤터를 건넌 711년 이후 7세기를 이어온 십자군과 레콩키스타를 모르고 안달루시아를 돌아본다는 것은 ,

* 파쇼정권, 프랑코에게 핍박받았던 FC 바르셀로나와 브랑코가 후원한 레알 마드리드 구단의 갈등을 모른 채 바르셀로나를 즐긴다는 것은,

  • 로마와 아프리카, 이슬람과 기독교세계, 파쇼와 코뮤니스트이념의 각축장에서

    죽임 당하고 쫓겨 사라진 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문화의 전시장 -로마에서 가우디까지

기원전 6세기에는 페니키아인들이 사라진 이베리아에 카르타고인들이 들어와 식민지를 건설한다.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지중해를 차지한 기원전 2세기부터 약 600년간 로마의 지배를 받는다.
수도교는 고대 로마의 도시라는 상징입니다. 세고비아

photo by @raah

타르크가 건너오다.
 

5세기경 서로마 멸망 후 서고트족이 침략하여 왕국을 건설하였으나, 서고트 왕국은 711년 북아프리카에서 침입한 이슬람교도에 의해 멸망한다.

아프리카 모로코의 아미르인 이슬람 지도자 타르크(타리크) 가 술탄에 앞서 무어인들을 이끌고 711년 지브롤터를 건넌 이후

이때 부르던 이름인 지발타리크(타르크의 산)가 바로 지브롤터의 어원이다.
그라나다는 14세기 기독교 성지회복까지 이슬람의 땅이었죠. 그래서 지중해의 입구인 유럽 아시아 해협의 이름이 지발타르크(지브롤터)가 됩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중]

이슬람 VS 가톨릭의 충돌

이베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교도는 8세기 초에 이베리아 반도의 3분의 2를 지배하게 된다. 이때 수학과 과학, 건축, 장식 예술 등의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스페인의 경제와 문화는 크게 발전한다.

이후 북쪽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가던 기독교인들이 국토 회복 운동을 시작하여,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 카탈루냐 등의 기독교 왕국이 탄생한다.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 기독교 왕국을 통합하고 마지막 이슬람 왕국을 몰아낸다. 700년 레콩키스타의 완성이다.
그 마지막 황혼의 여운이 알함브라 궁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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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함브라
photo by @raah




정성의 극치 / photo by @raah
알람브라는 아랍어 말 그대로 “붉다”라는 뜻을 지닌 궁전과 성곽의 복합단지이다. 1238년부터 1358년 사이에 지어졌다.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 지역의 아랍 군주의 저택이었다.현재 이슬람 건축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다.
무어인과 스페인의 미술을 결합한 형태로 이슬람 왕국의 직접적인 영향권 밖에 있었으므로 예술가의 창작 배경이 더욱 자극될 수 있었던 점도 알람브라 궁전 내의 독특하면서도 왕궁의 위엄을 드높인 한 요소가 되었다. 우아한 기둥은 하늘을 향해 솟아 있으며 종유석이 솟아 있는 듯이 외부가 이뤄져있어 공기 중에 떠 있는듯한 느낌이 가미된다.
웅장한 아랍 문화의 유적이 새겨져 있으며 수많은 왕이 이곳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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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2년 기독교 세력에 정복되면서 흰 빛깔의 도료와 도금과 회화 작업이 추가되었다.

## 신대륙 발견과 가톨릭의 수호자

그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해 대항해 시대를 연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대부분과 북아메리카의 1/3, 필리핀 등을 지배하며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 보석을 들여온다. 이 과정에서 마야를 비롯한 남미의 원주민들이 대부분 정복당하고 학살당하죠

종교전쟁기에 스페인왕조는 항상 구교인 가톨릭의 수호자였죠

> 이때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 포르투갈과 충돌하고, 독일과 프랑스의 신교에 맞서 가톨릭을 수호하는 종교 전쟁을 치르며 스페인의 해군 부대는 무적함대로 불리게 된다. 필립 2세 때 스페인은 최대의 황금기를 맞지만 1588년 133척의 무적함대가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작은 함대에게 크게 패한 이후 스페인은 서서히 쇠퇴한다.

이시기에 바로크 미술이 스페인의 거장 발라스케스가 왕실작가로 활동한 시기죠.
서양미술의 표현력은 17세기 바로크에서 비약적 발전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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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도 미술관에 가장 유명한<발라스케스의 시녀들>

하지만 저는 이보다도[교황 이노센트10세]의 초상이 그 천재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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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프리마기법으로 스케치 없이 빠르게 그리는 기법으로 이런 표현을….ㅎㄷㄷ
르네상스 3대거장이라는 라파엘로 그림을 평범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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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한 표현이라면 [세비야 물장수]죠. 바로크를 연 화가 카라밧지오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를 뛰어 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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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의 왕위 계승 전쟁 이후 19세기 나폴레옹의 침략,
고야가 활동했던 암울한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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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야의 1808년 5월3일>

이왕 프라도미술관까지 가셨다면 드가의 세밀한 그림들과, 프랑드르 화가들의 놀라운 표현들도 찾아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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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6개월전 포스팅에서 말씀드렸듯이
로히르 판 데르 베이든(Rogier van der Weyden)의 이 그림을 실제로 보시고 놀라지 않는 분은 20스달 보내드린다고
^^



지역 간 독립 전쟁, 자유주의자들의 반란을 거치면서 1873년 첫 공화제가 성립된다. 첫 공화정 성립 이후 입헌 군주제와 군사 독재 정치가 반복되던 스페인은

## 1936년 프랑코가 내란을 일으켜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다.

당시 귀족들의 후원을 뒤에 업은 프랑코에게는 히틀러도 도움의 손길을 보냈지만, 당시 공화파를 지지하는 사회주의 정권은 소련이 유일했다.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이 공화국 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지만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배경이다. 결국 스페인은 프랑코에 의한 군사독재 파시즘 국가가 되었다.

> 피카소가 그린 게르니카의 배경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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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게르니카(바스크 북부 도시)>


바스코 지방이나 까딸류냐 지방은 프랑코의 빕박을 받고 언어도 빼앗기게 된다. 1975년 프랑코 장군이 죽은 뒤 그가 생전에 지목한 부르봉가의 왕자 후안 카를로스가 후안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하고 새 헌법을 정하면서, 스페인의 민주주의가 시작된다.

이와같이 스페인은 로마, 이슬람, 기독교문명의 영향을 차례로 받았고 그 이후에는 나폴레옹 침입, 프랑코의 파쇼정치를 거치면서 많은 갈등 속에 통합되어 있다.

세 문명의 영향은 성당건축에 고스란히 남아 있어서 안달루시아지방을 중심으로 이슬람 건축의 정수를 볼 수 있고

세비아, 톨레도, 마드리드 등에서는 고딕성당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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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비아의 스페인광장

톨레도 대성당

그려 봤었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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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규모의 세고비아 대성당

또한 고야의 그림에는 나폴레옹의 침입과 어두운 시기가,

피카소의 게르니카에는 근대 파쇼정권의 참상을 느낄 수 있다.

프랑코에 의해 핍박을 받거나 강압적으로 통합되어 있는 지역들은 아직도 독립을 원하고 있어 지역 간 언어, 문화, 정치적 갈등은 여전하다.

브랑코가 후원했던 레알 마드리드 구단과 그에게 핍박받았던 FC 바르셀로나와의 축구 리그가 단순한 스포츠 대결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양 미술사가 주로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이탈리아, 프랑스 중심으로 저술되면서 스페인 미술이 잘 다루어지지 않는 경향이 많았지만, 사실 스페인미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벨라스케스, 고야, 살바도르 달리, 피카소를 빼 놓고 17세기 이후 현대미술을 논하기 어렵다.

가우디,n 가우디.

가우디의 건축은 근대 네오고딕 아르누보 건축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가우디를 이해하려면 건축분야에만 국한하여 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는 어느 스승에게서 사사 받은 일도 없고, 특정집단에서 일을 한 적도 없다. 또한 그의 작품은 어느 시대의 건축양식 및 특정분야로 분류하는 데는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의 작품은 그 시대의 양식과 형식을 초월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아무런 편견 없이 사물을 관찰하고 이를 작품화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동 시대 건축가는 논리성을 갖는 미학과 기하, 자와 컴퍼스를 사용하여 2차원의 평면과 직선, 원과 다면체에서 3차원으로 바뀌어 가지만, 가우디의 작품은 기하학적인 형태에 얽매이기보다는 자연적이며, 변형이 많고, 쉽게 인지되지 않는 곡선을 많이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건축가는 균형에 대한 타고 난 감각이 있어야 한다. 건축가는 건물의 형태를 디자인하고 그것을 구조전문가(구조기술사)에게 구조에 대한 수학적 안전성을 검토 받는다. 그 후 구조전문가가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면 건축가로서 자질이 있는 것이다.”

가우디는 환경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건축가이다. 조그마한 식물이나 지형이라도 될 수 있는 한 보존하고 존중했다. 그가 사용한 세라믹 제품(타일, 도자기, 벽돌)들은 재활용품이다. 버리는 물건을 수집하여 테라코타형식과 꼴라쥬형식으로 시공을 했다.
“당신의 스승이 누구냐”는 질문에 가우디는 대답 대신 창 밖을 가리켰다고 한다. 창문밖에는 지중해의 아름다운 해송과 자연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때 “ 내 스승은 바로 저것들이요”라고 말하며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자연과 함께 살아가도록 했으며, 생활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의 스승은 곧 자연이다.” 라고 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성가족 성당) (Sagrada Familia 1882~ )

이 성당은 1866년에 처음 계획되었다.
석조건물임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장식성을 보이는 네오고딕 양식은 유래를 찾을 수 없이 독보적이다.
내부로 들어서면 마치 숲에 들어선 듯 나뭇가지 모양의 기둥둘이 가지를 뻗으며 80m 높이의 천장을 받치고 있다. 이런 기적적인 구조의 기둥양식 역시 세계 건축사에 유래가 없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이 천재 건축가는 어떻게 이런 대담한 설계를 할 수 있었을까? 그가 자연의 모습들에서 탐구하고, 중력과 힘의 역학관계를 연구한 흔적을 모는 것만으로도 그 천재성에 감탄하지 않을수 없다.

이러한 중력에 의해 늘어진 모래주머니의 선과 각을 따라 성 가족성당의 기둥과 가지의 구조가 탄생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현대의 건축가들은 가우디의 건축의 과거와 미래를 연구할 수 없다. 다만 가우디를 발견할 뿐이다. 그의 독창성과 천재성은 오직 그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photo by @raah

이 성당은 가우디가 살아서 완성 지으려 한 건물은 아니다. 다른 건물은 가우디 자신이 설계하고 공사를 했지만 이 성당은 자신도 알지 못할 먼 훗날을 기약하며 설계와 시공을 했다.
일 년에 백만 명 이상의 방문객이 들르는 곳이다. 현재도 이 성당은 건축되어 지고 있으며 25년 후 이 성당의 완성을 볼 수 있을 것이다.

@raah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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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팅소녀 이미지는@cheongpyeongyull 님이 그려주신 작품입니다.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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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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