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선생 암살자 안두희를 응징한 정의의 기사 박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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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분단을 반대하던 민족주의계열 독립운동가 백범 김구 선생은 육군 포병 소위이자 주한 미군 방첩대(CIC) 요원이었던 안두희에게 살해 당합니다. (1949년 6월26일 서울 경교장)

안두희는 그 후 어찌되었을까요?

당시 극형에 처해질 줄 알았던 안두희가 진상조사도 유야무야된 채 군에 6-25 터진 이틀 후 그 와중에 복귀,소령 승진 예편하여 잘~ 그것도 집에 ‘百歲淸福(백세청복)’-청아하고 한가롭게 복을 누리며 살고 있었다는 게 역사적으로 적시된 것도 바로 박시서씨 재판부를 통해서였습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밀려 내려오는 순간에도 누군가 이 놈을 승진시키고ㅠㅠ

박기서씨 재판부는 안두희에 대해서도 판결문에 적시했다. “안두희는 김구 선생을 암살하고도 1949년 8월 극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일반적인 예상과 달리 종신형을 선고받고 석 달 만에 징역 15년으로 감형되었다. 1950년 6월27일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다시 군에 복귀하여 소령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예편하여 군납회사를 운영하는 등 특별대우를 받았다. 당시 특정 정치 세력의 비호를 받는다는 의혹이 있었고,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 속에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안두희는 단독 범행이라 주장하며 비호 세력에 대해서는 함구로 일관해왔기 때문에 김구 암살 범행에 대한 역사적인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등 안두희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분노가 상당한 것도 사실이다.”

시사IN 에 그 안두희를 죽인 박기서씨(71)의 인터뷰가 실렸네요 이런 분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제가 한 때 살알던 부천시 원미구의 한 오래된 아파트에 …..

● 박기서씨 1996년 10월23일
박씨는 운전대 대신 ‘정의봉’을 잡았다. 그는 이날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를 찾아갔다. 박씨는 “민족정기를 세우기 위해”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살해했다. 박씨는 사건 현장에 정의봉과 주소를 남겨두고 나와서 곧바로 자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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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죄로 구속된 그를 위해 사회 각계 인사 9000명이 ‘박기서 석방대책위원회’를 꾸렸다.
대법원은 “범행의 동기나 목적의 주관적 정당성을 인정하나, 법질서차원에서 징역 3년형.
1년6개월여 복역하다가 김대중 정부 출범 직후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 -기사내용 발췌합니다.-
    내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앞두고 박기서씨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인터뷰를 사양하는 박씨를 설득해 경기도 부천시 자택으로 찾아갔다. 집으로 기자를 들인 것은 처음이라는 박씨는 선반에서 물건 하나를 꺼냈다. 안두희 처단 당시 사용한 정의봉이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치라)’이라는 한자가 적힌 한지로 감싸 보관하고 있었다.

    “스물두 살 때부터 좌우명으로 삼아온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다. 남산 안중근 의사 기념관의 돌에 새겨진 바로 그 글씨다.” 정의봉에는 안두희의 혈흔이 남아 있었다. 박씨는 사건 현장에 정의봉과 주소를 남겨두고 나왔다. “정의봉은 검찰이 법원에 제출한 증거 1호였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임시정부기념관이 건립되면 전시할 테니 기증해달라고 해서 보관 중이다.”

1948년 전북 정읍 … 주경야독으로 한문을 깨쳤다. 배움의 갈증을 독서로 풀었다. 그는 20대에 안중근 의사의 삶에 빠져들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그는 같은 신자인 도마(토마스) 안중근 의사의 생애를 들여다보고 존경하는 인물로 마음에 새겼다. 30대 때는 운전기사로 생활하면서 틈틈이 <백범일지>를 읽었다. 김구 선생에 대한 존경심만큼 박씨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실망감도 커져갔다. 암살범 안두희가 이승만 정권 등 역대 정부의 비호 아래 생존해 있는 것을 보고 분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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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를 만든 책임이 크다

“나는 정말 보잘것없는 소시민이었다. 나보다 많이 배우고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 친일파가 득세하는 나라를 만든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그런 현실에 항상 실망하다가 내 손으로 직접 안두희를 처단해 역사적 책임을 물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때부터 박씨는 역사와 정의와 관련한 책을 닥치는 대로 탐독했다. 또 1987년 안두희를 응징하려다 처벌받은 권중희씨를 만나기도 했다. 권씨가 쓴 <역사의 심판에는 시효가 없다>라는 책을 받아 읽었다. 책을 통해 안두희가 인천시 신흥동의 한 아파트에서 부인과 함께 거주한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박씨는 거실에 백범 선생이 쓴 ‘양심건국’ 등 여러 붓글씨를 걸어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실행하기까지 고민을 거듭했다. 평생 책임 있는 가장의 삶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로서는 남은 가족의 생계 걱정이 가장 앞섰다. 최소 5년간 감옥살이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동안 가족이 굶지 않도록 저축을 했다. 화물차를 팔아 자녀들의 학비도 마련해두었다. 실행을 결심한 마지막 순간에는 당시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인 아들이 마음에 걸렸다. “아들이 받을 충격이 가장 걱정됐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안두희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촉박함에 갈팡질팡했다. 안중근 의사라면 이럴 때 어떻게 했을까 생각해봤다. 대의 앞에 가족에게 닥칠 시련은 조그만 것이니 내가 감수해야지 않을까, 그렇게 마음먹으니 편해졌다.” 안두희를 찾아갈 날짜를 잡고 어머니께 큰절을 올렸다.


실행 전날까지 박씨는 생업에 몰두했다. 시내버스 막차를 운행한 뒤 차고에 넣고 새벽에 택시를 타고 안두희가 사는 아파트를 찾아갔다….1996년 10월23일 그날따라 안에서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오전 11시가 넘어설 무렵 안두희 부인이 문을 여는 기척이 들렸다. 박씨는 먼저 부인을 작은방에 가뒀다.
“저 큰 손으로 김구 선생님을 쐈구나”

박기서씨는 ‘정의봉’을 들고 안두희가 누워 있는 안방으로 향했다. 거실 벽에 걸린 ‘百歲淸福(백세청복)’이라고 쓰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100살까지 청아하고 한가롭게 복을 누리며 산다는 뜻이었다. 순간 안두희가 쏜 흉탄에 쓰러진 백범 선생이 떠오르며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가자 누워 있던 안두희가 박씨를 쏘아보더니 일어서려 했다. “중풍을 앓고 있었다지만 나를 제압하려고 일어서는데 나보다 키가 훨씬 크고 기골이 장대했다. 저 큰 손으로 김구 선생님을 쐈구나 생각이 스치자 안두희의 팔을 정의봉으로 힘껏 내리쳤다. 거구가 그대로 쓰러지더라.”

박씨는 안두희 곁에 정의봉과 연락처를 남겨두고 안방을 나섰다. 거실에서 냉장고 문을 열고 정신없이 냉수를 들이키는 박씨 앞에 안두희 부인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벌벌 떨더니 남편만 응징하고 갈 사람이란 걸 눈치챘는지 ‘저도 물 한잔 주세요’라고 하더라. 물을 한 대접 따라 같이 마신 뒤 머리가 백짓장이 된 상태에서 부천성당으로 달려갔다.”

신부를 만난 박씨는 눈물을 흘리며 고해성사를 했다. 신부는 박씨에게 토스트와 우유를 먹인 뒤 경찰에 자수하는 전화를 걸어주었다. “형사들을 데리고 성당으로 찾아온 당시 형사반장은 ‘박기서씨가 맞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그는 형사들이 수갑 채우려는 것도 제지하고 그냥 연행하라고 했다.” 박씨가 경찰차를 타고 경찰서에 도착하자 기자들이 포토라인을 만들어 대기하고 있었다.

검찰은 1심에서 징역 7년을 구형했다. 인천지법은 “피고인은 일반적인 의미의 흉악범과는 구별된다”라며 살인죄 최소 형량인 징역 5년형을 선고했다.

2심에서 다시 징역 3년으로 감형된 박씨는 1997년 11월 대법원에서 최종 징역 3년형이 확정됐다. 이듬해 3·1절 특사로 풀려났다. “1년6개월여 감옥 생활을 하는 동안 정말 많은 국민이 위로와 격려 편지를 보내주셨다. 당시 리영희 한양대 교수도 격려하는 엽서를 보내주셨다. 그 인연으로 출소 후 생전에 매년 명절 때 찾아뵈었다.”

박씨는 출소한 뒤 운전기사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나를 공인처럼 대하니까 옛날보다 언행이 매우 조심스러웠다. 여기저기서 초청 강연 요청도 많이 왔지만 운전 쉬는 날 아니면 절대 안 갔다.” 그가 가입한 사회단체는 딱 하나, 민족문제연구소다.

시사IN 기사에는 박씨가 그 후
박정희 유신 독재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의문의 죽음을 맞은 장준하 선생의 사망 당시 목격자인 중앙정보부 협력자 김씨를 자주 찾아가서 ‘역사적 진실을 밝히라’고 설득하는 등 민족문제 정의구현을 위해 적극적 노력을 아끼지 않으면 살아온 삶도 소개합니다. ^^

bY: @raah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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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팅소녀 이미지는@cheongpyeongyull 님이 그려주신 작품입니다.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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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좋을수 없는, 깊은 산사의 작설차 @화암사 란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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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보다 더 자연속에 품위있는 찻집이 있다면 …..
국내 최고 분위기의 찻집. 자신있게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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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것만 photo by:강원관광공사

추석, 전 부치는 기름내를 뒤로하고
속초 울산바위 옆 산길로 2KM정도 숲길을 드라이브 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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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위 다리 건너 화암사 경내로 들어갑니다.
Tip: 입구부터 두 곳의 주차장이 있지만 걷기 싫다면 그냥 용감하게 차로 경내까지 가도 주차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살살 걸어올라가는 길이 힘들지 않고 아주 신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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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끝 벼랑 한 켠에 전통찻집 [란야원]이 있습니다.

멀리 독경소리 뒤로하고

깊은 숲속 가파른 산속 정자에서 차를

photo by@raah

화암사 찻집 란야원  

경관이 신선한 피톤치드에 뒤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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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늘 작설차를 한잔 합니다.
보성쪽에서 주지스님에게 늘 선물을 보내주시는데 남는것을 이 찾집에 주신답니다.
갈 때마다 고급스럽게 깊은 차향에 빠지게 됩니다.

가격은 그냥 보통 찻집수준입니다. 오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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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가면 구운 감자나 다식등도 곁들여 나와요
얘들은 늘 호박식혜를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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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분한 내부모습

내부모습은 오늘 문을 닫은 관계로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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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신후 화암사 경내를 둘러봐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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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ah 입니다. 이곳은 꼭 가보시기를 ….

맛집정보

화암사 란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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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신평리 산136-11


이보다 좋을수 없는, 깊은 산사의 작설차 @화암사 란야원

이 글은 Tasteem 컨테스트
<추석 기념> 5%보팅 이번주 맛집에 참가한 글입니다.


테이스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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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만나러 떠나는 나의 동유럽Hi story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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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bsburg 의 부흥과 빈의 예술
 

겨울, 헝가리와 오스트리아로 떠나기 전 그 얼어붙은 동토- 화려한 부다페스트 국회의사당을 보면서 300년전 젊은 여왕 마리아 테레지아가 100일도 안 된 아들을 안고 도움을 호소하던 모습을 만날 수 없다면,

쇤브룬궁의 수 많은 방들과 그 컬렉션을 돌아보면서 거기서 고군분투한 테레지아와, 스러져가는 제국의 답답한 요제프 황제, 그와 어울리지 못하고, 검은 상복을 입고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다가 칼에 찔려 사망한 비운의 아름다운 여인 시씨의 뒷모습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온다면,

그 많은 건축물과 미술품들이 발하는 빛을 볼 수 없을 것이다.

유럽의 동쪽 빈에 쌓여있는 엄청난 문화재와 수장품들을 보면서 전 유럽을 뛰어다니던 풍운아, 합스부르크를 제국으로 일으켰던 워크 홀릭, 상속녀 마리의 마음을 빼앗았던 막시밀리안을 모른다면,

아름다운 벨베데레궁을 들러 화려한 호프부르그에 들어가면서

그 앞에 당당히 서있는 그 주이공, 태양왕 루이를 버리고 오스만의 20만 대군에 공격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합스부르크 육군원수가 된 천하명장 외젠을 몰라본다면,

나는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거기에 크림트의 유딧과 키스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면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을 감상하러 벨베데레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동유럽은 빈을 중심으로
체코,헝가리,폴란드, 러시아 n 오스트리아/ 크림트

15세기 이전 몽골 기마민족의 횡포

  • 러시아는13세기 초, 러시아는 몽골 칸의 봉신에 불과했다.
  • 헝가리는 [훈족의 나라]라는 뜻이다.
    부다페스트 영웅광장의 천년 전 헝가리 건국 부족장들


photo by @raah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237년 칭기스 칸의 손자 바투가 침공하자 모스코바, 블리디미르 등 러시아 공국들은 순식간에 그의 손에 떨어졌다.

몽골군이 노브고로드 코 앞에서 헝가리, 폴란드 방향으로 돌아가자, 이 기회를 틈타 스웨덴이 1240년 노브고로드를 침공했다.
16살 짜리 군 지휘관인 알렉산드르는 친위대와 민병대를 이끌고 즉시 스웨덴의 대군을 급습,
‘넵스키’ 네바강의 아들이란 칭호를 얻었다.
인기가 너무 치솟아 쫒겨났다가 1424년 다시 독일 기사단이 침공하자 넵스키는 다시 부름을 받는다. 중무장한 정예 독일 기사단은 페이부스 호수의 얼음밑에 수장된다 .

그러나 킴차크 한국의 칸 바투가 러시아 공국들에 충성을 요구했을 때 알렉산드르 넵스키는 복종을 결정한다. 철저하게 몽골에 협력하여 세금징수에 저항하는 도시는 스스로 가차없이 징벌했다. 1252년부터 죽을 때까지 칸의 동의아래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모스크바 공국도 킵차크 한국의 봉신에 불과했다.

14,5세기 유럽에 [국가]가 등장하다

그 이전 동북 유럽은 몽골 킵차크 한국 등의 횡포에 시달릴 뿐이었지만,

1. 체코
1346년 동유럽에서 보헤미아(체코)의 카를 4세는 뛰어난 통치능력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됨과 함께 프라하를 아름다운 도시로 건설하여 정치적·문화적으로 크게 번창하였다. 

체코 카를교

서유럽은 프랑스가

15C말 영국과의 100년 전쟁을 거치면서 제후들을 무력화 시킨 황제가 전권을 휘두르면서 가장먼저 봉건체제를 뛰어넘는 강력한 국가체제를 완성하여 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그 후 한자동맹 등 도시국가연합은 힘이 약해지고,
헝가리등 독립 국가들이 한창 힘을 키우는 중이었다.

러시아

이반3세는 1469년 동쪽의 카잔 한국을 굴복시킨 후, 러시아를 통일한다. 그는 이후 크림한국과 동맹을 맺은 후 킵차크 한국에 저항하여 국가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노브고로드의 지배층인 보야르들이 리투아니아를 의지하며 러시아 민중과 종교를 배반했다는 명분으로 노브고로드를 공격한다. 민중의 지지를 받는 모스크바가 이후 러시아를 통일한다. 그는 이후 크림한국과 동맹을 맺은 후 킵차크 한국에 저항한다. 1480년 10얼 우그라 강에서 이반3세는 몽골의 도강을 막는 수준의 방어로 일관했다. 겨울이 다가오자 몽골군은 퇴각한다. 캅차크 한국은 1502년 멸망한다. 이반3세는 1472년 비잔틴 제국 마지막 황제의 조카 딸과 결혼한다. 겨우 국가꼴을 갖춰가던 모스크바 공국은 이제 비잔틴정교회의 후계자가 된다.

1477년. 합스부르크의 시작 막시밀리안

미술사 박물관, 뒤러의 막시밀리안황제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3세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당시 직할영지인 오스트리아는 변방 중에 변방이었다.

1477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부르고뉴(저지대, 지금의 베네룩스 3국)의 샤를이 사망하자 그의 딸 마리에게 이목이 집중했다.

프랑스는 7살짜리 샤를 8세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다.

막시밀리안이었다. 막시밀리안은 즉시 자신의 재산을 저당 잡혀 군대를 만들어 저지대로 향했다.

그의 결혼에 프랑스가 반발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네덜란드와 프랑스 동부 변경지역에 걸친 넓은 부르고뉴 영토를 차지했다.

482년 마리가 낙마로 사망하자

네덜란드 의회가 어린 필리프(후에 카스티야의 미남왕 펠리페 1세가 됨)의 섭정 역할을 하는 것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1485년 전쟁을 일으켜 의회를 무찌르고 자신의 권리를 되찾았다.

149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즉위했다.
1490년 그는 오스트리아에 있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래 영토 대부분에 대한 통치권을 되찾았는데 그때까지 이 영토는 헝가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후 그는 공위이던 헝가리의 왕위계승 후보자였다. 보헤미아의 블라디슬라프 2세가 헝가리 왕으로 선출되자 그는 블라디슬라프에 대해 군사활동을 일으켰다. 1491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블라디슬라프가 후사없이 죽을 경우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위계승권이

합스부르크가로 넘어오도록 만들었다.1494년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자(이탈리아 전쟁). 1495년 막시밀리안은 나폴리를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를 물리치기 위해 교황·스페인·베네치아·밀라노 등과 함께 이른바 신성동맹을 맺었다.

1496년 이탈리아에 원정하여 프랑스군을 격퇴 후 결혼 결혼.

그해 아들 필리프를 스페인의 스페인제국 공동통치자 이사벨여왕과 페르난도의 딸후아나 공주와 결혼시키고 1497년 딸 마르가레테를 스페인 왕자와 결혼시킨다.

이후 건강했던 공주의 언니 오빠가 모두 사망하고 그들의 후계자들마저 요절 ^0~

그렇게 다 요절하면서 1500년 후아나는 제국의 상속인이 된다. 이 결혼을 통해 막시밀리안은 스페인과 그 식민지에 대한 계승권을 확보했다.

1515년 둘째 손자 페르디난트를 헝가리,보헤미안 공주와 결혼시킴

그의 사후 1526년 헝가리 보헤미아 왕이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오스만과의 전쟁에서 전사하자,^0~
합스부르크가는 헝가리와 보헤미아마저 소유하게 된다. 이후 체코의 전 영토가 1918년까지 300여 년간 합스부르크왕가의 속령이 되었다.

중부 유럽과 이베리아 반도까지를 포함하는 막시밀리안의 복잡한 동맹 체제는 그를 유럽 정세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는 손자 카를이 황제에 선출되도록 하고 투르크족에 대항해 유럽을 단결시키기 위해 죽기 전 1년 동안 노력하다가 1519년 1월 12일 오버외스트라이히의 벨스에서 사망했다.

현재의 빈 시청사. photo by @raah

그의 행운은 로또가 아니다. 워크홀릭이었다.

58세 때인 1517기록만 보더라도 그는 벨기에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27개 도시를 돌아다녔다. 가히 살인적인 스케줄을 10대 후반부터 죽을 때까지 이어온 것이다.

1520년 독일에서는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파문 당한다.

1610년 폴란드와 러시아 상황


붉은 광장의 유일한 동상 미닌과 포자르스키

뛰어난 차르 고두노프가 1605 사망하자 러시아는 1613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서기까지 혼란스런 동란시대를 겪는다. 무질서와 전쟁 탐욕, 방화, 질병이 창궐했다. 보야르들은 자기들끼리 권력다툼에 스웨덴군을 불러들였고, 곧 폴란드군도 입성한다. 1610년 폴란드가 보야르들의 안내를 받으며 모스크바를 장악한다. 이때 모스크바 동쪽의 니즈니 노브고르드의 일개 상인 쿠즈마 미닌은 사람들을 독려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포자르스키를 총 사령관으로 추대했다. 자신은 병창을 맡았다. 이들로부터 시작된 민군은 1612년 모스크바를 해방시키고 다음해 의회를 통해 새로운 차르로 로마노프를 선출한다.

-1613 최후의 종교전쟁, 30년 전쟁이 발발한다. 특히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은 구교인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2세와 곧이어 신교의 스웨덴에 짓밟힌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선제후에 오른 1640년 인구는 절반이 되어있었다. 1685년 루이14세가 낭트칙령을 폐지하자 선제후는 즉시 위그노(신교)들을 파격적 조건으로 유입한다. 앞선 경제, 교육, 기술과 함께. 그들을 위해 지어진 프란최지저 돔(프랑스 교회)가 베를린 젠다르멘 마르크트에 있다.

2. 1683년, 외젠 공작과 벨베데레궁

  • 막시밀리안 황제의 스승, 나폴레옹이 존경한 명장

    • [벨베데레 궁 내 미술관에 걸린 초상]

      외젠(오이겐)은 유럽 역사에서 가장 탁월하며, 성공한 군사 지도자 중 한 명이다. 사부아 가의 귀족으로 파리에서 태어나 루이 14세의 프랑스 궁정에서 성장했다. 외젠은 아버지가 죽고 어머니는 궁중독살사건에 연루되어 망명한다. 그는 교회에서 경력을 쌓아 주교가 될 운명이었으나, 그의 나이 19세 때 군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루이 14세로부터 프랑스 군복무를 거절당하자, 외젠은 태양왕의 결정에 반발하여, 여자로 변장하고 파리를 탈출한다. 1683년 오스만의 20만 대군에 빈을 공격당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합스부르크 군주국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외젠(오이겐)은 프랑스를 탈출한 지 10년 만에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육군원수, 공작이 되었다. 외젠은 1683년의 빈 공방전(Siege of Vienna)에서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워 승진한다. 뒤이어 신성 동맹 전쟁과 그 후 9년 전쟁에서는 그의 사촌인 사부아 공작과 함께 싸웠다.
      외젠의 명성을 드높인 것은 1697년 젠타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압승을 거둔 것 때문이었다.

    • 아름다운 슬로베니아 브레드 호수도


      photo by @raah
  • 아름다운 보석 크로아티아 드부로브니크도 외젠이 아니었다면 터키의 일부로 남았을 것이다.

겨우 500명의 손해로 적에게 30,000명의 손실을 입혔고,오스만 군의 주력군은 궤멸되었으며 사라예보(Sarajevo)가 불타버린 보스니아를 획득하였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트란실바니아와 부다, 에게르,카니즈사(트란실바니, 헝가리 , 슬로베니아)가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외젠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 참가하는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 군대를 조련하면서 영국의 말버러 공작과 함께 협력하여 프랑스를 상대로 싸웠다. 겨울에도 과감한 이동과 전면전을 불사하는 그의 혁명적 전술을 이해하는 동시대인은 거의 없었다. 그를 질시한 빈의 귀족들은 그를 총 사령관에서 끌어내리려 했지만 영국의 앤 여왕은 “내 돈이 필요하다면 반드시 외젠 공작이 총 사령관자리에 있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블렌하임, 오우데나르데와 말플라크의 전장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고, 특히 그는 나아가 북이탈리아의 제국군 사령관으로 1706년 투린에서 가장 명백한 승리를 얻었다. 60년 동안 3명의 합스부르크 황제 레오폴트 1세, 요제프 1세와 카를 6세를 섬겼다. 오스트리아에서 외젠의 명성은 확고하다. 그의 여름 궁전인 벨베데레에는 크림트의 대표작을 비롯 다양한 미술품이 소장되어있다. 동 시대에 러시아에서는 표트르 황제가 러시아의 1700년대는 젊은 차르 표트르의 시대였다. 서유럽으로 그랜드 투어를 다녀온 젊은 차르는 전통적 복식과 의식, 군대를 개혁하고 덴마크 노르웨이 등관 연합하여 대 스웨덴 제국에 맞섰다. 1703년 오두막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계획하다. 나르바요새를 탈환, 스웨덴 동맹은 해체된다. 스웨덴은 러시아를 공격하지만, 지속적으로 병참선을 공격당한 스웨덴 군은 1709 폴타바에서 대패한다.
스웨덴 제국을 물리친다.

1740년, 쇤브룬과 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 당시 합스부르크는 연이은 패전으로 국고가 바닥난 상태였으나 황제는 마리아에게 제국을 물려주기 위해 국본조칙을 만들어 각국의 승인을 받기이해 노력했다. 외젠공작은 그보다는 강력한 군대만이 제국을 지킬수 있다고 반대했으나 황제는 나약했다. 권력정치의 비정함을 꿰뚫지 못하고 열강의 승인을 믿고 안심했다.

카를 6세는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그의 사후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영토들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프로이센과 바이에른, 프랑스, 작센에서는 그녀의 계승의 반발하였고, 그녀의 합스부르크 가의 모든 영토에 대한 상속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며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독일의 제후들은 그의 먼 친척인 비텔스바흐 왕가 출신 카를을 카를 7세로 추대한다. 결국 합스부르크 가와 혈연 관계를 맺고 있던 나라들이 서로 자신이야말로 합스부르크 가의 상속권을 물려받아야 한다며 영토를 분할하기 위해 오스트리아로 쳐들어 갔다. 이것이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년 - 1748년)이다.
쉰브른 궁전

반 오스트리아 동맹 1741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2세가 처음으로 삼만명의 병사를 이끌고 합스부르크 가 영토인 슐레지엔을 공격하였다. 대신들은 모두 슐레지엔을 포기하고 프로이센과 협상하기를 원했으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슐레지엔을 결사 방어하겠다는 결의를 분명히 하여, 제1차 슐레지엔 전쟁이 발발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바이에른과 전쟁을 치르기로 결의했지만, 오스트리아는 거듭되는 전쟁 때문에 전비도 원군도 없고, 궁정의 중신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녀는 당시 23살이었고 네 번째 아이를 임신 중이었다. 어렵사리 모은 16000명의 오스트리아군은1741년 슐레지엔에서 대패한다. 1741년 프로이센,바이에른,프랑스,스페인이 반 오스트리아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 헝거리를 제외한 모든 영토를 나눠 갖기로 결정한다.

합스부르크 중신들은 그 모든 요구를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테레지아는 결사항전을 결정한다.

그해 6월 25일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선 헝가리 여왕으로 즉위했다. 그 해 9월 11일 헝가리 의회에서 검은 상복에 100일도 안된 아들을 안고 눈물로 호소하여 군자금과 병력을 얻었다. 그리고 군사력 증가 및 강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는 보헤미아로 쳐들어 왔고 프라하를 점령해 버렸다. 프랑스도 라인강을 넘었다.
그녀는 일단 적을 줄이기 위해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내주고 협상한다. 그리고 보헤미아가 아닌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을 공격하여 점령해 버린다. 왕위계승전쟁 후 마리아는 합스부르크의 내정을 개혁한다. 의회의 조세권을 박탈하고, 능력위주의 인재를 등용, 상비군 창설 등이다.

1756년 그녀는 후에 슐레지엔을 찾으려고, 재상 카우츠기백작과 다운백작을 내세워 지난 300년 동안 적이었던 프랑스와 동맹하고, 떠오른 강국 러시아와도 손을 잡는다. 반 프로이센 동맹은 7년 전쟁을 불러온다. 1757년 프로이센이 먼저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지만 보헤미아에서 다운백작의 오스트리아 군에 대패한다. 7년전쟁을 통해 슐레지엔 회복에는 실패하지만 그녀로 인해 오스트리아, 헝가리, 이탈리아를 아우르는 합스부르크는 위기를 넘기고 살아남는다.

이후,프리드리히는 1757, 로스바흐에서 프-오 연합군을, 로이텐에서 8만의 오스트리아 군36,000의 병사로 대파하고 불멸의 장군 반열에 오르며 프로이센을 일약 강국으로 만든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프란츠 슈테판과 혼인하였고 16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의 남편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되었고, 자녀들 중에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요제프 2세와 레오폴트 2세가 있다.

그리고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나폴리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 파르마의 공비 마리아 아말리아 등이 있다.

1848년 합스부르크의 몰락, 프란츠 요제프와 시씨

빈 중심에는 슈테판 대성당과 호프부르크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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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슈테판 대성당 photo by @raah

호프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신성로마제국의 심장이었다.

1789년부터 프랑스에서는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스페인, 합스부르크 프로이센은 프랑스를 공격하지만, 나폴레옹의 대 육군이 유럽의 강자로 떠오른다. 오스트리아도 나폴레옹에게 패한다. 나폴레옹의 전진은 1812년 모스크바에서 쿠투조프에게 패하기까지 쉬지 않는다.

나폴레옹:쿠두조프
1805 러시아에서 은퇴한 쿠투조프가 다시 불려온 건 러시아가 대 나폴레옹 전쟁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은 러시아군이 전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동맹 오스트리아군을 쳐 부순다. 쿠투조프는 후퇴를 원했지만 황제 알렉산드르1세는 전투를 명한다. 러시아군은 대패하고 쿠투조프는 물러난다. 이후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다. 1812년 은퇴한 쿠투조프가 다시 불려온 건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침공했기 때문이다. 전쟁의 신 나폴레옹은 전면전을, 쿠투조프는 초토화 전술로 맞섰다. 나폴레옹을 도운 건 황제와 국민들의 애국심이었다. 모스크바를 총 한방 안 쏘고 내주다니. 1812년 9월7일 보로디노에서 두 군대는 격돌한다. 프랑스군이 승리하지만 두 군대 모두 큰 피해를 입는다. 쿠투조프는 전격 후퇴한다. 나폴레옹은 모스크바를 접수하지만 그것이 파멸의 시작이었다. 1812년 12월 “전쟁은 적군의 궤멸로 끝났습니다.” 쿠투조프의 보고.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보면 러시아의 초토화 전술도 전술이라기 보다는 전투만 하면 깨지니 부득불 도망다니며 어수선한 가운데 택한 임시방편이라는 느낌을 준다
프랑스 3월 혁명의 바람이 빈에도 불어 페르디난트 황제는 수도를 떠나야 했다. 위기에 봉착하자 황제는 조카에게 황제양위를 결정한다. 1848년 18세의 프란츠 요제프는 황제가 된다. 젊고 빛나는 외모의 황제와 눈부시게 아름다운 황후 알리자베스(시씨)의 동화같은 러브스토리는 신민들의 동경을 받았다. 소요는 안정되고 합스부르크는 권위를 되찾았다.

황제의 사촌인 요제프와 바이레른의 공주 헬레네가 만나는 자리에 따라갔던 헬레네의 동생 엘리자베스(시씨)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으로 요제프의 마음을 흔들어 버렸다.

황후가 된 엘리자베스의 우아한 아름다움은 당시 여러나라에서 미의 극치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성실과 절제, 일관성과 의무의 화신으로 충실하게 황제의 업무에 임했지만 용도 폐기된 ‘왕권신수설’을 신봉하고 귀족가문만을 상대하며, 변화와 발전을 싫어하는 평범하고 답답한 사람이었다.

전기와 기차도 싫어했다. 그는 매일 정해진 시간에 기상하여 늘 같은 검소한 식사와 정해진 업무에 충실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정해진 일과에 충실하느라 궁정에 갇힌 사랑하는 시씨의 삶조차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그녀의 정신은 병들어 간다. 그녀는 제국의 법을 싫어하여 자유주의를 존중했으며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헝가리를 사랑했다.

1866년 제국이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패하여 위기에 처했을 때 시씨는 남편에게 영향을 행사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만들어 위기를 돌파하게 한다. 이를 통해 헝가리도 상당한 지위를 얻는다.

황실의 예의가 너무 중요한 황제는 아내나 황태자의 자유주의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억압적인 제국에 비판의식을 가졌던 황태자는 황제의 눈 밖에 났고 결국 타락하고 빈둥거리다가 1889년 스스로를 쏴 버린다. 슬픔에 쌓인 시씨마저 검은 상복을 입고 온 유럽을 떠돌아다니다가 1898년 스위스에서 무정부주의자의 칼에 찔려 사망한다.

시씨 박물관

항상 관광객으로 북적이는 호프부르크 입구에 오스트리아에 유일하게 단 한 사람의 여성을 기억하기 위한 박물관, 시씨 박물관이 있다.
1914년‘오스트리아 합중국론’을 주창하던, 요제프의 아들 페르디난트가 당시 독립국이었던 보스니아에서 살해당하면서 1차대전이 발발한다. 1916년 황제가 사망하고 2년 후 격변의 19세기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연이은 패전으로 해체되어가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1차 대전 종전과 함께 영원히 사라진다.

  • 요제프황제

    거대한 호프부르크 내의 아말리엔부르크를 빠져나와 노이에부르크를 지나면 조용한 정원,부르크가르텐이 나온다. 그 귀퉁이에 군복을 입은 프란츠 요제프의 수수한 동상이 있다.

    1865, 프로이센의 빌헬름1세와 비스마르크

    그는 자유주의자들을 굴복시켰다.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니라 피와 철에 의해서만 해결된다.”는 오스트리아 및 바이에른, 작센등 독일 대다수의 연방국들과 전쟁을 벌여 승리한다. 1870년 프랑스 나폴레옹3세 에게도 대승하여 1870년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독일제국을 수립한다.

1897년 분리파와 크림트

세상에는 직접 그 앞에 서기 전에는 그 진가를 느낄 수 없는 작품들이 있다.

개인적으로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의 앞도적 육중함과 라오콘상, 소피아 대성당의 삼각궁륭과 돔이 만들어내는 광활한 공간, 대영박물관의 파르테논 박공조각들이 그런 작품이다. 유명한 명화는 아니더라도 프라도 미술관의 뒤러의 초상화, 반 데어 베이덴의 직물 묘사에 대한 집착도 화보로는 느낄 수 없는 작품이다. 그런데 벨베데레에 전시된 크림트의 대표작 ‘키스’와 ‘유딧’이 보여주는 관능성 또한 그러하다.

합스부르크의 몰락 이후에도 빈은 음악과 예술의 도시이다. 모차르트, 베토벤이 활동했던 도시이고 곳곳에서 오페라와 발레공연이 이어지는 도시였다. 하지만 유럽화단의 변방으로 여겨지던 오스트리아가 19세기 말, 세계미술계에 돋보이는 창조적 변화를 이끌어낸다. ‘빈 분리파’의 출연이다.

특히 크림트의 그림은 독보적이다. 당시 나타난 아르누보양식의 평면적 장식성을 황금을 붙여 화면을 가득 메운다. 거기에 당시 대두된 무의식과 성적 본능에 대한 탐구는 농도 짙은 관능성을 내세우며 세기말적 상징주의로 가득 채워져 있다. 탈 장르적인 그의 실험들은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국제적 관심을 빈으로 향하게 했다.

빈에 분리파의 상설 전시공간이었던 분리파 회관이 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흰 건물에 그들의 모토가 황금색으로 씌여 있다. 그 대표자 크림트와 그에 못지않은 에곤실레의 그림을 보려면 웨젠 공작의 별장 벨베데레로 가야한다.

크림트는 26세에 황제 프란츠 요제프가 재정지원을 하는 부르크극장의 천정화를 의뢰받을 만큼 제국내에서 인정받는 유명한 화가였다. 그러나 프랑스 인상파에 발전상에 영향받은 크림트의 그림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당시 빈 미술계를 지배하던 미술가연맹이 변화하는 세계의 흐름을 막는다고 생각한 크림트는 연맹을 탈퇴하고 같은 생각의 작가들과 ‘오스트리아 조형미술가 연맹’을 결성한다. 1897년 분리파의 탄생이다.
전통적 기법은 배제 되었고 모호한 상징, 난해하거나 과도한 누드이미지,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초상화와 인상주의적 풍경화가 나타났다.

벨베데레에 전시된 크림트의 대표작 ‘키스’와 ‘유디트’가 보여주는 관능성은 직저 그 앞에 서기 전에는 경험할 수 없는 감동이 있는 작품이다.

앗수르 (앗시리아) 장수 홀로페르네즈로 부터 유대를 구한 유딧
사진에 찍히지 않음. ㅠㅠ

피부색 사이로 함께 내비치는 붉고 푸른 색점들이 성적 감동을 일으킨다. 앗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즈를 유혹하여 목을 자르고 이스라엘을 구한 영웅 유딧이 고혹적인 가슴을 내보이며 성적 쾌락을 느끼는 표정을 짓고 있다. 그의 몽롱한 표정은 성 도착증 환자 같기도 하고 죽은이의 머리를 잡고 있는 사체애 환자처럼 보인다. ‘키스’를 받는 여인의 환희에 빠져드는 행복한 표정도 흥분에 쌓여 상기되어 있고 남자를 휘감은 가녀린 그녀의 손길에서도 농염함이 묻어난다. 때문에 둘을 둘러싼 황금색 장식도 남자의 성기로 읽히기도 한다. 황금 장식에 둘러쌓인 둘은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하다. 죽음을 넘어선 성이다.

19C 오스트리아 정신분석학과 에로티시즘 미학

  • 영화 우먼인골드의 소재가 된 작품.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크림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지만 사교계의 여인들, 작품의 모델 등 여러 여인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가 사망했을 당시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 소송을 냈을 정도였다. 크림트의 에로티시즘은 비난을 많이 받았지만 대중의 인기는 여전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다나에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에서 무력함을 제거하고 순간적 정사의 덧없음을 초월해 욕망의 숭고한 충족에 이르도록 구원자가 되어야 한다.”
프로이드가 성욕을 본능적 에너지로 보았다면 크림트는 그것을 숭고한 것으로 생각했다. ‘숭고한 에로티시즘 미학’을 창조한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히스테리연구.1895],[꿈의 해석.1899]등을 지었고 그가 창시한 수요심리학회는 1908년 ‘빈 정신분석학회’로 개명한다.

크림트에 의해 발견된 에곤실레는 크림트의 관능적 미학에 죽음의 그림자를 덧입힌다. 다양하고 자극적인 색채로 누드를 표현하는 방법은 닮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의 그림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드로잉 선들은 더 과장되게 꿈틀거리며, 색채도 어둡고 거칠고 자극적이다. 인체의 왜곡, 독특한 구도와 색채가 특징인 심리적이고 에로틱한 주제의 초상화와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크림트와 함께 이들의 에로티즘은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에 영향을 끼쳤다. 1911년 한때 클림트의 모델이었고, 자신의 그림 모델이었던 발레리 뉘질과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소녀들을 모델로 쓰는 것에 분노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쫓겨나기도 한다. 이후 빈 외곽 노일렌바흐로 이사하여 작업실을 열었으나, 미성년자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고 작품은 포르노로 취급되어 압수되었다. 재판에서 미성년자 유혹 및 학대 혐의는 기각되었으나 공공장소에서 에로틱한 그림을 전시한 것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을 받고 24일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요절한 젊은 작가의 누드화에는 늘 벗겨지지 않고 미화되지 않는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가 거친 색채 사이로 배어있다. 실레의 그림은 벨베데레 궁과 체스키크롬노프에 있는 에곤실레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참고: 동유럽여행보고서( 제 블로그입니다.)



관련 링크
https://blog.naver.com/raah2/220931330511


그를 만나러 떠나는 나의 동유럽Hi story여행


이 글은 스팀 기반 여행정보 서비스

trips.teem 으로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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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 도자기공방 화우 불티나는 중 n국수한그릇 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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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달 전 포스팅한 화우공방 요즘 인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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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이 올랐어요 ^^ 올려도 잘나간다네요
4만냥서 더는 안 올리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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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기로 서울 인사동 포함해서 국내 도자기 작가 중 이정도 디테일한 색감과 세밀한조형성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실 유약울감으로 이정도라면 살짝 비정상적일정도로 몰입과노동력을 요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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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울갤러리로부터 회화작품으로 전시 제의를 받았지만 거절했답니다
그의 지론이 독특합니다

작품으로 걸리는 순간 대중으로부터 멀어진다

속초 오신다면 더 늦기전에 가보세요

국물이 시원한 조개국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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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간정콘도는 군인시설입니다만
바다만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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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장으로 현지인이 추천한 바닷가 국수집을 찾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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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포스팅한 바다정윈 진입로 딱 맞은편 뒷골목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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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지락 칼국수에 정종 한잔
웬지 인문학적 소양이 느껴지는 차분하고 잘생긴 젊은이가 서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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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물이 끝내줘요 조개와 호박 감자를 푹푹 울겨낸 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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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풀고 조갯살을 안주로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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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도 고성군 용촌리

by:@raah


맛집정보

얼큰하고시원한국수한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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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봉림동 의창구 사림동 14-1번지 지하1층 창원시 경상남도 KR


속초 도자기공방 화우 불티나는 중 n국수한그릇 해장

이 글은 Tasteem 컨테스트
내 고향 6시 고향의 맛집에 참가한 글입니다.


테이스팀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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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odworking] 사다리 변신 의자 [lovesharing♥]

의자속에 숨겨놓은 사다리 하나쯤 있으면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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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죠]
https://www.youtube.com/watch?v=iYqaCLNL56I

만들어 볼까요?

각도톱이 꼭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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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크기로 딱 그려놓고 맞춰가며 잘라야 합니다.

기본틀은 월넷(동남아 월넷: 구르미) 판재는 오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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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소톱으로 잘라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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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합은 도미노와 목공풀로

깍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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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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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해서 도미노 끼운 후

크램프로 고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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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사면 고정용 부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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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체와 앞다리 사이는 요것으로
루터기로 홈을 내서 본드 칠하고 끼워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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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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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장치 꼭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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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lovesharing♥&Auction events - wooden toys. 나무장난감 경매

  • 보팅으로 세 명의 아동에게 기부를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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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steem]부조리에 대한 실존적 집단반항. 페스트 /까뮈

반항과 저항은 서양문학특히 프랑스에서는 인간의 존재성과 관련될 만큼 중요한것 같아요 며칠전 @relaxkim님 포스팅, 아멜리 노통브의 세살… 서평 중에도 아주 멋진 글이 있었죠

살아 있다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다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면대에 난 구멍만큼밖에 생명력이 없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엄마와 천장을 동일선상에 놓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둘 중 하나는 거부해야 한다.
유일하게 나쁜 선택이 바로 선택을 하지 않는 것이다.-

반항의 대명사….까뮈의 대표작입니다.^^

  1. 까뮈와 [페스트]
    1. 부조리: 유리된 권태사회
    2. 저항하기
    3. 실존과 사랑
    4. 융화집단 ‘We’의 탄생




부조리’와  더불어 ‘반항’  -까뮈



booksteem By @raah

까뮈와 [페스트]

부조리’와 더불어 ‘반항’ 그리고 나아가 ‘연대와 집단반항’은 카뮈의 작품과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페스트]에서는 까뮈 이상과 사상의 절정인 ‘집단적 반항’이 문학적으로 가장 잘 형상화된다. 데카르트의‘코기토’와 비견되는 까뮈의 명언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를 나타낸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집단적 반항’을 표현한 작품이 그의 모든 작품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그의 사상적 흐름의 정점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1942년에 출간된 󰡔시지프 신화 Le Mythe de Sisyphe󰡕와 󰡔이방인 L’Etranger󰡕등으로 이어지는 카뮈의 ‘부조리- 반항’의 사상을 󰡔페스트󰡕는 ‘연대’라는 실천적이고 희망적인 사상으로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다.

Oran 시를 강타한 페스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갈 무렵, 이 시에 조직된 자원보건대를 통해 카뮈는 자신이 평소 꿈꿔 왔던 공동체, 곧 동지애와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한 ‘우리’의 한 모범적인 예를 선 보인다. 이 공동체는 까뮈의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즉 ‘고독한’ 상태에서 ‘연대적인’ 상태로의 이행의 구체적인 한 예로 든 것이다.
또한 󰡔페스트󰡕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을 각각 카뮈의 분신(分身)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모르방 르베스크, 󰡔알베르 카뮈를 찾아서 - 태양과 역사󰡕, 김화영 옮김, 나남출판사,.
의사 리외가 페스트에 대해 가지고 있는 전문 지식은 카뮈자신의 지식이다. 실제로 󰡔페스트󰡕를 집필하는 동안 그는 페스트 자체에 대한 자료 수집 등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카뮈는 의사 리외에게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투사한다. 카뮈는 청년시절에 결핵을 앓았고 입원 및 요양원 생활을 하며 의사들과 많은 접촉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의사 리외가 가진 직업적 참을성과 그의 노동자 출신 아버지와 노모 등 가족관계 역시 카뮈와 비슷하다.

“신(神) 없이 성인”이 되고자 하는 타루의 성향도 까뮈와 비슷하다.

해수욕, 유랑과 소요에 대한 취향, 그리고 세세한 것을 놓치지 않는 관찰 본능,
사형과 살인을 거부하는 태도는 그대로 까뮈의 것이다.
알제리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했던 카뮈처럼 타루도 정치활동을 한 경험이 있다. 소설을 쓰면서 완벽한 표현을 추구하는 고통스러운 열정을 가진

시청직원 그랑 또한 작가 카뮈가 학창 시절 시청 직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한 경험에서 겹쳐진다. 카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콩바󰡕 지의 사설을 통해 프랑스인들의 레지스탕스 운동을 촉구했던 언론인이었다. 1939년, 아랍인들의 비참한 생활 조건을 폭로하기 위해「카빌리의 비참」이라는 르포르타쥬 를 쓴 적이 있다. ‘사랑’과 ‘행복’을 자신의 삶의 최우선 가치로 삼고, 아랍인 취재를 위해 오랑에 온 기자 랑베르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까뮈는 페스트의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가치와 소리를 모두 표현하면서 그들을 ‘저항하는 우리’로 연대하고 있다.

반항하는 우리

따라서 페스트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이 한데 뭉쳐 페스트를 물리치기 위해 조직한 자원보건대는 그대로 까뮈가 추구한 형제애와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맺어진 ‘반항하는 우리’의 모습니다. 그러므로 리외와 타루가 바다에서 함께 수영 하는 장면과 리외가 페스트로 죽어가는 타루를 끝까지 보살피는 장면은 약자들과 연대하며 우정을 나눈 까뮈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인상적인 기억을 기록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까뮈의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억과 슬픈 기억이 페스트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다. 까뮈 자신에게도 [페스트]는 최고의 소설일 것이다.

“우리가 우정을 위해서 무엇을 하면 좋을지 아세요?” 하고 그가 물었다. “좋으실 대로 합시다.” 리외가 말했다. “해수욕을 하는 거죠. 미래의 성인에게 그것은 어울리는 쾌락입니다.” (……) 그들은 옷을 벗었다. 리외가 먼저 물에 몸을 던졌다. 처음에는 차갑던 물이, 다시 떠올랐을 때는 미지근하게 느껴졌다. 리외는 몸을 뒤집어서 자기 친구와 나란히 같은 리듬으로 헤엄을 쳤다. (……)몇 분 동안 그들은 같은 리듬, 같은 힘으로 세상을 멀리 떠나, 단둘이서 마침내 도시와 페스트에서 해방이 되어서 전진했다. 리외가 먼저 멈추었다. 그리고 그들은 천천히 되돌아왔다. (……) 그들은 다시 옷을 주워 입고, 말 한마디 입 밖에 내지 않는 채 발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들은 똑같은 심정이었고, 그날 밤의 추억은 달콤한 것이었다. p 334)


정오가 되자 열은 절정에 달했다. 일종의 내장성 기침이 환자의 몸을 흔들었고 환자는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타루는 열과 기침 사이사이에 아직도 간간히 자기 벗들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마침내 눈을 뜨는 횟수도 드물어졌다. 그리고 햇빛 속에 드러난 황폐해진 그의 얼굴은 그때마다 더욱더 창백해졌다. 폭풍에 휩쓸린 그의 온몸은 발작적으로 경련하더니 이제는 그의 모습을 번쩍번쩍 비추던 번개도 점점 드물어졌고, 타루는 그 폭풍 속으로 서서히 표류해 가고 있었다.

그에게 그렇게도 친근했던 그 인간의 모습이, 지금은 창 끝에 찔리고 초인간적인 악으로 불태워지고 하늘의 증오에 찬 온갖 바람에 주리 틀리면서 바로 그의 눈앞에서 페스트의 검은 물결 속으로 빠져들어갔지만, 그로서는 이 난파를 막는 데 속수무책이었다. …..

그리고 마침내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는 눈물이 앞을 가려 리외는 타루가 갑자기 벽 쪽으로 돌아누워 마치 몸 한구석에서 가장 근원적인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기나 한 것처럼 힘없는 신음 소리를 내며 숨을 거두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p 376)

󰡔페스트󰡕는 출간 일 주일 만에 비평가상 Prix des Critiques을 받은, 카뮈의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높은 작품으로 여겨진다. 1957년에 그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는데도 커다란 역할을 했다.

ISBN : 978897013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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