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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현 side effect 전 출품작.
[서평] 한병철의 [피로사회]- 성과주의 사회에 대한 철학적 고찰과 쉼
ISBN9788932022888
#긍정성의 패러다임이 개인을 궁지로 몰아간다.
- “얘들아~ 꿈을 가져야……” 악!! 아이들 바로 경기한다. 애들도 지쳤다.
한병철은 [ 피로사회]에서 이시대의 본질을 통찰하면서 과감하게 거장 철학자 사상가들의 논리를 비판하며 그의 독특한 개념을 제시한다. 이 책의 핵심적 테제는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양문화를 지배해 온 부정성의 패러다임이 20세기에 긍정성의 패러다임으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회가 푸코가 말한 복종적 인간이 사는 규율사회 였다면, 이제 20세기는 긍정성을 획득한 성과주의 사회라는 것이다.
성과주의 사회란 포스트모더니즘 사회, 규제와 억압의 철폐가 이루어진 사회이다. 이 긍정의 과잉은 역설적으로 개인의 자아를 궁지로 몰아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마치 늘어나는 지방으로 인해 병들어 가듯, 성과주의 사회의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갱신하며 자신을 마모시킨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낙오자로 여기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성과를 위해 약물을 사용하는 도핑사회가 되어 만성피로에 떨어진다.요즘 사람들은 무의식이 없다
- “하면 된다?”- 시대착오적 발상
‘열심히 일하고 권력을 쟁취하라?“ -이미 먹고살려고 아등바등 살던 지난 세기의 충고다. -[인생의발견] 중에서
한병철은 푸코, 아감벤, 프로이트, 칸트까지 모두 부정성의 구조에 머무르고 있으므로 긍정이 지배하는 현대 성과사회에 이 이론을 적용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19세기를 지배해온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과 무의식은 모두 억압과 부정성의 구조에서 기술된다. 그러나 지금의 사회는 무한한 긍정성의 구조를 갖고 있다. 무의식은 소멸되어 오늘날의 주체는 무의식이 없다고 말한다. 파격적이다.
당신이 자본가요 착취자인 동시에 당신이 착취의 대상자 입니다.’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의 전환논리는 우리사회에도 생산적 논제를 제시한다. 오늘날 학생인권, 의무과목 철폐, 자기주도학습, 창의성, 개별성강조, 입학사정관제의 도입은 학생들을 입시지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주체로 길러 낸 것이 아니라 더욱 불투명한 경쟁, 끝없는 자신과의 “절대적 경쟁”으로 내 몰았다. 한 가지만 잘하면 대학간다는 구호는 학생들을 자기자신과 스스로 경쟁하는 자발적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도록 만들었다.
우리 사회의 전반적 에너지원이었던 부정성의 패러다임은 사실 많이 약해져 왔다. 분단이후 남한을 지탱해온 위협적 타자 즉 이데올로기적 타자인 북한을 부정하는 타자의 위협에 대한 인식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이후 계속해서 약화되어왔다. 반대로 민족적 부정성을 강조해온 민주세력들은 정계에 진출하면서 민족 동질성을 강조하며 미국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전환해 버렸다. 이러한 이중적 부정성이 서로 부딛쳐 나타난 혼선과 충돌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근본적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 으로 보인다.
성과주의 사회 즉 ‘더 생산적이 될 것’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가 이러한 타자 부정의 패러다임을 자기착취의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버린 것이다. 많은 성공학 개론과 경영학 서적들은 ‘당신이 경영자이며 당신이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병철은 이를 ‘당신이 자본가요 착취자인 동시에 당신이 착취의 대상자 입니다.’라고 읽는 듯하다.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하다.
문제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자본주의 시스템이라고 진단되었다면 어디에서 답을 얻을 것인가. 저자는 이 시스템이 이상적 자아가 되기 원하는 개인의 욕망에 기초한 것이므로 그러한 욕망의 허구성을 깨닫고 자각하는데서 시스템의 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시대에 만연한 우울증의 배후에는 어떤 타자나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제2의 자아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성과사회의 시스템적 압력이 있음을 논증한다. 병의 원인이 타자라면 문제는 간단하다. 저항하면 된다. 그러나 우울증의 배후에 있는 그 착취자가 나 자신이고 강제가 아닌 ‘끝없는 성공의 유혹’의 형태를 띤 것이라면 이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 2000년 전통의 성격이론 ‘에니어그램’의 대 주제 ‘알아차림’ 이 해법이다.
피로를 느껴라.
한병철이 제시하는 희망은 긍정성에 기초하지 않는, 즉 부정성에 기초한 영혼의 피로이다. 그것은 나만의 피로, 소진이 아니라. 우리의 피로, 함께 나누는 피로, 더 이상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깨닫는 무위의 피로이다. 하나님의 안식, 오순절에 모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피로이다. 이것은 게으를 권리 즉 쉼과 같은 것이다. 21세기 우리는 좀 쉬어도 될듯하다.
- 할 수 있다는 생각에 넘어가지마. 거부하고 피곤을 느끼라고. 쉬어. 안 굶어!!!!
저는 대략 이런 내용으로 이해했어요…
끝! - 이하 피로사회 우울사회 좀 자세히 발췌요약 [ 미리니름 많음]
1) 신경성폭력
2)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3) 깊은 심심함
4) 보는 법의 교육
5) 피로사회
6) 우울사회 내용요약
- 1) 지난세기는 면역학적 시대였다.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
면역학적 행동본질은 공격과 방어이다. 이질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제거의 대상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구도는 ‘이질성’과 ‘타자성’이 소멸되고 아무런 면역반응도 일으키지 않는 ‘차이’로 대체되었다. 이국적인 것은 단지 관광객의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 면역은 부정성의 변증법이다. 면역학적 타자가 자아에 침투하여 자아를 부정하려하기 때문에 자아는 타자의 부정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방접종도 부정의 변증법이다.
박테리아적 시대 ☞ 항생제의 발명으로 종언
but 21세기는 신경증시대이다.
우울증, ADHD,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21세기의 질환은 긍정성의 변증법이다.
긍정의 과잉에서 비롯한 병리적 상태라 할 수 있다. 정보시스템, 커뮤님케이션 시스템, 생산시스템 모두 배반상태라는 것이다. 지방은 어떤 면역반응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같은 것에 의존하여 사는 자는 같은 것을 죽는다.”(보리야르)
긍정성의 과잉에서는 다른 것을 밀어내는 면역저항이 아니라, 소화 진경적 해소 내지 거부반응으로 나타난다. 과다에 따른 소진, 피로 질식 역시 면역반응이 아니다….내재성의 폭력이다. 시스템의 폭력, 우울증, ADHD, 경계성 성격장애, 소진증후군은 자아가 종직적인 것의 과잉에 따른 과열로 타버리는 것이다.
2) 규율사회의 피안에서
병원 정신병자 수용소, 감옥, 병영, 공장으로 이루어진 푸코의 규율사회(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되다’ 부정성의 사회.)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 21세기는 피트니스클럽, 오피스, 은행, 쇼핑몰로 이루어진 성과사회로 변모했다. …성과사회는 부정성에서 벗어난다. ‘할 수 있음’이 성과사회의 긍정적 조동사이다. 이제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프로젝트, 이닛티브가 대신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과 낙오자를 낳는다.
3) 깊은 심심함
멀티태스킹- 사회적 발전과 주의구조의 변하는 인간사회를 점점 더 수렵자유구역과 유사한 곳으로 만들어 간다. …좋은 삶이란 성공적인 공동의 삶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거니와 , 좋은 삶에 대한 관심은 날이 갈수록 생존 자체에 대한 관심에 밀려나고 있다.
4) 보는 법의 교육
보는 법의 교육은 정신성을 갖추기 위한 최초의 예비교육이다. 인간은 어떤 자극에 즉시 반응하지 않고 속도를 늦추고 중단하는 본능을 발휘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정신의 부재상태, 천박성은 “자극에 저항하지 못하는 것, 자극에 대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에 원인이 있다. 즉각 반응하는 것, 모든 충동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이미 일종의 병이고 몰락이며 탈진이다. 니체가 말한 ‘중단하는 본능’이 없다면 행동은 안절부절못하는 과잉 행동적 반응과 해소작용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다. ..
컴퓨터가 빠른 것은 어떤 종류의 이질성도 들어설 여지가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계가 전반적으로 긍정화 되는 추세 속에서 개인도 자폐적 성과기계로 변신한다. …인간이 부정의 존재라고 한다면 세계의 전면적 긍정화는 무시할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5) 피로사회
활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성과사회는 서서히 도핑사회로 벌전 해 간다. 그 와중에 ‘브레인도핑’처럼 ‘신경향상으로 대체된다. 도핑은 말하자면 성능 없는 성과를 가능하게 한다. 과학자들조차도 신경향상제의 도움을 받지 않는 것이야 말로 무책임하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성과사회, 활동사회는 그 이면에서 극단적 피로와 탈진상태를 야기한다. 과도한 성과의 향상은 영혼의 경색으로 귀결된다.
성과사회의 피로는 사람들을 개별화하고 고립시키는 고독한 피로다. 그것은 한트케가 [피로에 대한 시론]에서 ‘분열적 피로’라 부른 그 피로다. “ 그러니까 그것은 우리의 피로가 아니고 이쪽에는 나의 피로가 그 쪽에는 너의 피로가 있는 꼴이다”. 이런 분열적 피로는 인간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상태로 몰아넣는다. 심한 피로 때문에 말할 수 있는 능력이, 영혼이 다 타버린다. 피로는 폭력이다. 그것은 모든 공동체, 공동의 삶, 모든 친밀감, 심지어 언어 자체마저 파괴하기 때문이다.
반면 한트케는 보는, 화해시키는 피로를 내세운다.
- 자아피로가 세계가 없는 피로라면 이 ‘근본적 피로’는 세계를 신뢰하는 피로이다.
이는 아무것도 할 능력이 없는 탈진상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은 정신을 태어나게 한다. 성령을 맞는 오순절 사람들은 언제나 피로한 모습일 거라고 상상한다. 피로의 영감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보다, 무엇을 내버려두어도 괜찮은지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 피로는 특별한 태평함, 태평한 무위의 능력을 부여하는 ‘눈 밝은 피로’이다.
(할 일이 있는데 탈진한 것ㅠ :긍정 vs 부정: 피곤하게 안 해도 돼. 안 굶어. ^^)
탈진의 피로는 긍정적 힘의 피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간다. 반면 영감을 주는 피로는 부정적 힘의 피로, 즉 무위의 피로다. 원래 그만 둔다는 것을 뜻하는 안식도 모든 목적 지향적 행위에서 해방되는 날,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염려에서 해방되는 날이다. 그것은 막간의 시간이다. 무위의 날, 쓸모없는 것의 쓸모가 생겨나는 날인 것이다. 그것은 피로의 날이다.
*초탈? ㅋㅋ
… 한트케는 이런 막간의 시간을 평화의 시간으로 표현한다. 막간의 시간은 무차별성의 시간, 우애의 시간이다. …무위를 향해 영감을 불어넣는 ‘오순절 모임’은 활동사회의 반대편에 놓여있다. ‘오순절-사회’가 미래사회의 동의어라고 한다면 도래할 사회 또한 피로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3. 우울사회 내용요약
“신들도 지쳤고 독수리도 지쳤으며, 상처도 지쳐서 스스로 아물었다.” -카프카[프로메테우스]
간을 먹는 독수리는 성과주체와 전쟁을 벌이는 제2의 자아라고 해석할 수 있고, 피로란 스스로 고통의 모르는 간의 고통이므로 자기착취의 주체인 프로메테우스는 엄청난 피로에 빠지고 말 것이다.
반면 카프카는 치유 적 피로, 상처를 아물게 하는 피로를 상상한다. 책[피로사회]도 잉여와 반복에서 비롯된 ‘자아피로’의 대척점에 세계를 믿고 맡기는 ‘치유 적 피로’를 놓아두고 끝낸다.
프로이트의 자아는 규율 적 주체이다. 명령과 금지로 이루어진 억압적 강제장치이다. 정신분석학은 금기와 명령의 부정성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부정성을 철폐해가는 자유로움을 자처하는 성과사회이다. 후기 근대적 성과주체는 정신분석학이 대상으로 하는 복종적 주체와는 완전히 다른 심리를 가지고 있다. 프로이드의 자아는 부인, 심적 억압의 불안의 장소인데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부인할 일이 거의 없다. 긍정의 주체다. 만약 전자를 무의식이이라고 한다면 후기근대 성과주체에게는 더 이상 무의식이 없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규율사회를 떠났다.
칸트의 ‘양심’도 분열되었다.
칸트의 복종적 자아와도 공통성이 있다. ‘양심’ . 칸트의 도덕적 주체역시 ‘폭력’에 예속된다.
모든 인간은 양심을 갖고 있고 내면의 판사에게 감시당하고 위협받고,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도록 요구받는다. 이 내면을 감시받은 폭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에 합체되어있다.
칸트의 주체도 분열된다. 이 주체도 타자의 명으로 행동하지만 그 타자는 자신의 일부인 것이다. 도덕적 주체는 피고인 동시에 재판관인 것이다. 칸트의 주체 역시 의무적인 일에 매달리며 자신의 성향을 억누른다. 여기서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도덕적 본질’인 칸트의 신은 징벌, 심판의 기관뿐 아니라 보상의 기관이기도 하다. 도덕적 주체로서 쾌락적 성향을 억누르고 고통 속에서 해낸 일에 대해 아주 정학한 비례에 따라 도덕적 신이 행복을 배분한다. 보상의 위기의 가능성은 없다. 왜냐하면 신은 기만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기근대의 성과주체는 자유, 쾌락이 원칙이다. 타자의 명에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귀 기울인다. 이 타자로부터의 자유에서 새로운 강제가 발생한다는 데 자유의 변증법이 있다. 나르시즘 적 자기관계로 전도되어 심리적 장애의 원인이 된다.
보상은 타자를 전제하는데 타자와의 관계가 사라지면서 보상의 위기가 찾아온다. 칸트의 신은 도덕적 업적을 보상해 주었는데 보상구조에 이상이 생기면서 더 많은 성과를 올려야하는 강박관념에 빠진다. 사람들은 열려있는 방향으로 일을 해 나가고 시작과 끝이 있는 완결의 형식은 사라져 버렸다.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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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책입니다. 사서 보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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