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엔 오늘 눈이 왔어요
제2부 농업, 문명, 전쟁
문화적 진보라는 개념
18세기 진보의 개념과 19세기 헤겔 마르크스, 실증주의의 대두로 ‘문화적 진보’라는 개념이 등장했고 스펜서, 타일러, 모건 등 사회학과 인류학의 창시자들이 이 개념을 옹호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의 ‘난잡함’에 무감하며 사변적, 추상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도킨스는 이 문화적 경험이 ‘밈’형태로 유전자에 반영되어 생물학전 진화에 적용된다고 주장했다. 저자는 이 진화과정에서 ‘복잡성이 강화되는 과정의 경향성’만을 진화의 방향성으로 인정하고자 한다.
- 시기만 다를 뿐 어차피 때가되면 나타난다.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진화가 완전히 임의적이지는 않다는 점이다. 생물진화적 입장에서 모든 생물종이 다양하게 진화하기 보다는 공통적으로 ‘광합성’ ‘날개비행’이 나타나는 것처럼 문화적 진화도 비슷한 조건에서는 다른 지역에서도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
저자는 초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콜롬버스 시기의 페루를 같은 선상에서 바라본다.
무엇을? 농업,목축 그리고 국가문명.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문화적 진보의 가장 큰 현상 두 가지는 농업과 목축의 등장과 국가 문명의 등장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이다.부와 권력 소유의 절대적 수단은 바로 ‘무력’이었다.
수렵채집인 VS 농경민, 농경민VS 유목민, 부족사회 VS 족장 사회, 도시국가VS연합 대제국, 소국가 VS 대국가
1. 농경사회와 전쟁
- 인류는 왜 농사를 시작했을까?
기원전 8000년 경 서남 아시아에서 시작된 농업. 이후 1000년 만에 목축이 시작되고 5000년 후에는 국가문명이 발생했다.
수렵채집인은 농경인 보다 더 노동을 적게 했고, 더 건강했고, 더 다양한 식생활을 영휘 했다. 그런데 인류는 왜 농사를 시작했을까?
정주민들이 더 강했다. 규모면에서.
제럴드 다이아몬드가 [총균쇠]에서 밝혔듯 아프리카 남부의 반투어족 사용부족은 부시먼 같은 다른 어족들을 모두 밀어냈다. 농업과 목축이 발달한 것은 인구증가와 정주생활의 결과였다. 수렵채집인은 밀려나거나 농업, 정주인 문화를 모방했다.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된 농업은 1년에 1KM씩 서북쪽으로 이동하여 이집트와 북아프리카까지 전파되었고 이후 북유럽으로 전파되었다.
1) 인구가 곧 힘이다. 농업 전파의 방법은 전쟁
농경민들은 식량의 확대와 다산 등의 영향으로 처음 천년동안 10배로 불어났고 이후 산업혁명이전까지 100배로 늘어났다. 인구의 증가는 밀집주거를 가능하게 했다. 가축과 식량은 수렵채집인들에게 좋은 약탈거리였다.
농경민들의 주거지는 요새화되기 시작했고 가축은 주거지 중심에 위치한 것이 그 증거이다. 미시시피, 프에블로 토니토 등의 정착지들은 밖에서 볼 때 폐쇄된 벽처럼 보였고, 메사베르데 절벽궁전은 절벽으로 보호되는 골짜기에 지어졌다. 기원전 8000년의 예리코의 방어시설, 즉 길이 600M의 석축과 해자는 농업과 함께 분쟁이 격화되었음을 나타내는 강력한 고고학적 증거물이다. 이러한 방어시설은 모든 농경지에서 발견되지는 않는데 이는 예리코처럼 많은 노동력이 동원 가능한 인구밀집지역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다른 지역에서는 목책정도나, 부족 자체의 호전성을 높이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 기원전 10세기 그리스인, 기원전 4세기 북부 이탈리아 켈트족, 0세기 게르만족, 5세기 노르웨이 스카디나비아인들은 모두 요새화되지 않은 소부락에 살면서 오직 전쟁과 농업에만 종사하며 호전적으로 살았다.
2) 인구가 힘. 부족탄생- 국가로 발전
분쟁이 확산되면서 부족들은 같은 언어로 결속된 종족간 연합의 형태를 취한다.
1세기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등장하는 종족들은
3세기 프랑크족과 알라만족으로 대체된다.
각 부족은 주로 수 천명을 넘지 않았고 부족 연합은 2~3만 명 수준이었다.
멕시코만의 크리크 6부족 연합, 중앙아메리카의 아즈텍족, 아테네의 4개 이오니아 부족, 스파르타 3개 도리스부족, 로마 3개 라틴부족연합들은 지역마다 3세기에서 14세기를 넘어서면서 국가로, 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3) 신분 위계의 탄생
정착과 목축재산은 수렵채집인 사이에서는 가난으로 인해 어느 정도 유지되던 ‘평등의식’을 없애고 신체-번식 체계에 위계를 만들었다. 아프리카는 미혼남성 전투집단이 생겨났고 타키투스에 따르면 게르만의 1부 1처제는 야만인 중 거의 유일한 예외였다.
중세초기까지 분쟁의 중심은 부족사회 내, 외에 - 들판,가축, 여성, 지위, 주술과 관련된- 보복의 악순환으로 발전했다. 아직 국가의 억지력은 미미했다. 심지어 18세기의 스코틀랜드 고지인과 이후 아프리카 부족, 20세기 아마존 부족까지 비슷한 패턴을 보인다.
즉 저자가 볼 때 분쟁후의 남성살해, 여성납치 강간까지 분쟁의 내용은 1부의 수렵채집인 사이의 분쟁과 별 차이가 없다. 단지청동기와 철기무기의 변화였고 일반 전사들은 여전히 맨몸이었다.
4) 포진전투
분쟁의 양상을 바꾼 것은 ‘부족이동’이었다. 켈트족, 게르만의 이동은 부족 전체의 명운을 건 것이었으므로 무리와 전투범위가 넓어져 포진전투가 중요해 졌다. 두 부족은 그리스 로마군의 팔랑크스에 비해 호전적이고 체격도 우월하고 장검을 사용했으므로 우세할 때가 많았지만, 이들은 끈기가 부족했고, 부족의 수가 많아야 2만명 수준이었으며 로마가도처럼후방지원 인적자원도 없었다.
- 5세기에 로마가 이들에게 당한 것은 로마 황제들의 고질적 내전 속에서 제국 내에 정착한 게르만족을 부족집단(동맹)단위로 받아들인 실수 때문이다.
2. 목축부족의 전쟁
BC4000년경에 가축화된 말은 2천년 후 전차로 사용되었고 BC1000년 쯤 기마용으로 전쟁에 사용되었다. 말과 바퀴는 서남아시아에서 시작되어 유라시아 대륙으로 전파되었고 이후 15세기 이후에야 서 아프리카로 전해졌다.
목축의 발달은 새로운 유목민족을 만들었다. [갈리아전쟁기]에 등장하는 브리튼,게르만족은 호전적일수록 농업보다 소 사육에 의존하고 있었다. 목축민은 농경민보다 더 넓은 지역을 사용하면서 집단의 크기는 비슷했다.
12세기 동 아프리카 마사이족은 17부족 25만명,
도도트족은 2만명,
베두인연합은 1만명 수준이었다.
이들은 상대의 방목지를 예사로 습격했고, 농경민의 가축과 물이 있는 농경지는 손쉬운 표적이었다.
말을 사용하는‘부족’이 더 전투적이었다.
지난 천년동안
나일어를 쓰는목축민들이반투어농경민들을 괴롭히고 쫒거나 지배했다. (예,르완다: 투치족의 후투족 지배) 이는 그대로 BC3000년 비옥한 초승달 지역 연구에 그대로 적용된다. 소국가, 도시국가로 발전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BC24세기에 목축민의 후손인 셈족에게,
사르곤이 수메르인 영역을 다스리다가 구티족 목축민에 의해 파괴되었다.
당시 우르3왕조는 목축민인 아모리인의 습격을 막기 위해 두 강을 잇는 280KM의 방벽을 건설했다. 결국 BC2000년에는 바빌론 등 아모리인들의 국가들이 세워졌다.
레반트의 아모리인(아람인,이스라엘인)도 가나안 구릉 목초지에서 평원으로 지배력을 확대해 나간 것으로 본다.
때문에 저자는 여호수아 보다는 사사기의 형태를 이스라엘의 초기전통으로 인정한다.농업대신에‘목축’은 유라시아 대륙에 큰 어족의 발생에 대한 주요원인이었다.
3. 무장종사단, 왕
신석기 혁명 후 자본이 축척되며, 부를 축적한 사람에게 권력이 재생산되었고 집단간 자원분쟁이 일어나면서 폭력분쟁이 중요해지며 빅맨은 전사들을 무장종사단으로 거느리게 된다. 사회는 위계화되고 계급화된다.
카이사르와 타키투스가 관찰한 켈트인, 게르만 부족사회의 변모는 가장 오래된, 분명한 인류학적 설명이다.
갈리아족들은 족장이나 빅맨들이 우수한 전사들을 종사로 받아들여 권력, 부, 폭력으로 원주민들 위에 군림하며 권력의 되먹임했다. 족장의 지위는 필요시에는 동지 전사로 이루어진 측근들을 포함하는 피호민의 규모로 결정되었다.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폭력적 경쟁이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그들의 직업은 농업과 전쟁뿐이었다. 습격으로 얻은 전리품은 족장이 더 많은 사람을 고용할 수단이 되었다. 계층화가 심해질수록 족장은 귀족으로 변모했고, 피호민의 수가 많을수록 왕이 되려는 경향을 보였다.
왕의 탄생
진정한 왕권은 기원전 6세기 에투루리아의 지배하에 국가화, 도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일부 족장들의 시도로 나타났다. 로마는 이후 공화정으로 이행하지만 일부 주요 씨족 가문들과 그들이 동원하는 피호민들이 주축이 되었다.
초기의 로마의 전쟁들은 단일 가문의 전쟁처럼 묘사된다.
8세기의 그리스 문명은 문자로 기록되었다. 그 이전의 사회의 모습은 [일리아드]에 묘사된 모습이었을 것이다. 왕은 신의 자손으로 주장되었고 수 많은 전사영웅과 군대를 거느리고 침략전쟁을 통해 재산과 여자를 약탈했을 것이다.
문자문명 이전의 목축인들의 전파는 유전자지도를 통해 추측되기도 하지만 그 폭력적 상황들은 유물이나 고고학에 의존해야 한다. 족장들은 방책이나 해자로 요새화된 밀집지역에서 거주했다.
도체스터 메이든 성 유적
농경민들도 점차 국가화 제국화되면서 스스로를 강화했다.
기마족과 바이킹
훈족 아틸라가 왔을 때 유럽의 농경민화된 부족, 국가들은 제대로 저항할 수 없었다. 목축민들 뿐 아니라 스칸디나비아등(바이킹)의 바다의 사람들 부족들도 대부분 침략과 약탈로 농경민들을 괴롭혔다.
기원전 12세기 히타이트 제국과 미케네 문명을 파괴한 것도 이들일 가능성이 있다. 그리스의 많은 도시들이 파괴되었고 이집트를 침략했다가 람세스 3세에게 진압당하기도 했다.
서평소개
문명과 전쟁 1편 농경이전. https://steemit.com/kr-writing/@raah/4rmub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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