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BN: 978895769428203340
[역설과 반전의 대륙] 라틴아메리카 정치 사회 테마
한 달 전 이 책을 연재하다가 멕시코 다음, 쿠바를 하려니까 또 논쟁에 휘말릴까 겁이나서 멈췄습니다. “너 빨갱이지? 누구편이냐 싸우자!!” 테러를 당한 트라우마가 있습니다.ㅋㅋ
그리고, 조심조심[세계를 뒤흔든..] 볼쉐비키 혁명과 [체 게바라]를 연재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쿠바]를 올리기 전에 한 달 전 올렸던 칠레~ 멕시코 혁명을 오마쥬합니다.
사실 남미의 역동적인 혁명사는 체 그리고 그 이전 볼쉐비키에 영감을 얻었다고 봐야겠죠? ^^
다시 한 번 오해를 막기 위해 말씀드리면 ^^ 저는 철저한 민주주의자이며
이런[마르크스] 보다 밀의[자유론]을 더 좋아합니다.
단지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 복지의 대부분, 즉, 평등권,노동권-봉건제극복 민주주의 투표권, 여성평등, 아동노동금지, 8시간 노동, 제국주의 파시즘 극복 등은 기존 기업가나 자본가가 아니라 사회주의, 공산주의자들의 피와 노력위에 얻어진 역사적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라는 마음에서 이런류를 올립니다.
- 칠레 아옌데와 여성대통령 바첼레트
- 우루과이 게릴라 민주주의 무히카
- 포퓰리즘 –베네수엘라 차베스
- & 5. 브라질 선반공 룰라
- 소수자는 영리하다. 멕시코 인디언
- 사회운동의 진화-멕시코 마르코스
- 정치로 몰락한 부자나라 아르헨티나
- 끝없는 혁명- 쿠바
- 국제관계 변화-라틴 아메리카
- 서평 : 순수,열정, 정의를 이루는 대륙
1) 볼셰비키와 중국 홍군, 그리고 쿠바
2) 게바라의 사회주의
3) 많은 그리스도들의 혁명
□ 참고문헌
역설과 반전의 대륙
체 게바라 평전
전쟁과 평화. 톨스토이
- photo from : www.dailymail.co.uk (사진은 콜롬비아 게릴라) 요기서 펌
눈물의 감동드라마[남미정치] 1 .총을 든 여자들, 사제들, 대통령, [칠레 n우르과이]
[역설과 반전의 대륙] 라틴아메리카 정치 사회 테마,1 칠레,우루과이
1. ‘공포’를 이겨낸 한 편의 감동영화, 칠레 女통령 바첼레트
세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자 대통령으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
칠레는 세계최초로 선거를 통해 사회주의 정부를 이룬 나라다.
그는 칠레의 개혁을 시도했지만 1973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군부 쿠데타군이 대통령궁을 압박해오자 철모를 쓰고 소총을 들고 끝까지 저항했다.
쿠데타군의 정당성을 보증할수도 있는 사임, 망명 등의 권유를 단호히 거절하고 투쟁하다가 스스로 자결했다.
출처:thomaslee101님의 블로그
대통령은 마지막으로 방송을 통해 칠레국민들에게 “머잖아 다시 가로수가 우거진 길이 열리고 자유로운 사람들이 걷게 될 것”이니 희망을 잃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쿠데타 세력은 집권하자 “칠레에서 마르크스주의 암세포를 제거하겠다”며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물론 모든 좌파세력과 쿠데타정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 어쩌다 통행금지를 위반한 사람까지 보두 잡아들여 고문하고 살해했다. 칠레를 노동자의 나라가 아닌 기업가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들과 손잡은 카톨릭 보수주의는 카톨릭 진보운동에 반발한 사람들이었다. 대표적으로 가톨릭 교회와 파시즘에 심취한 하이메 구스만이 있다. 그들의 파시스트 무장집단 ‘조국과 자유’는 칠레 상류층 청년들로 구성되었는데 미국 CIA의 지원을 받아 아예데 대통령의 부관을 살해한 적 있다.
- 진보적 가톨릭 운동은 1960년 대부터 시작하여 후에 해방신학으로 발달한다.
신부님이 총을 드는 곳
진보적 카톨릭 사제들은 불평등과 빈곤을 개선하려는 모든 평화적 노력이 실패하자 후에 민족해방군에 가담했다. 토레스 레스트레포는 사령관이 되어 싸우다 사망한다.
피노체트 치하의 18년은 지옥이었다. 60~70년대 대륙전체에 이런 구사정권들이 들어섰고 저항도 완강하게 벌어진다. 이 게릴라들의 30%는 여성이었다.
1978년 여성노동자들이 최초의 시위를 벌인다. …1988년 피노체트 정권은 8년 연장 투표를 실시한다. 야권은 국민들이 정권이 심어준 공포에 맞서게하기 위해 “칠레 곧 기쁨이 올거야!” 라고 노래했다.
결국 “피노체트는 혼자 경기에 출전해서 2등으로 들어왔다.
* photo from : www.dailymail.co.uk (사진은 콜롬비아 게릴라)
2006년 승리한 최초의 여성대통령 미첼 바첼레트는 오랫동안 간직한 소망을 전했다.
“모두가 함께 넓혀온 자유의 가로수 길을 여러분과 함께 걸어가겠습니다.”
2. 민주주의자로 변신한 우루과이 무장게릴라 무히카
라틴 아메리카는 게릴라의 대륙이었다.
1970년 몬테비데오 술집에서 6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져 있던 호세 무히카는 40년 후 대통령이 된다.
1980년 엘살바도르 정글에서 싸우던 산체스 세렌 사령관이 34년 뒤,
1970년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한 23세 지우마 호세프가 40년 뒤 대통령에 당선된다.
게릴라들은 대부분 정당으로 전환한다.
극좌 게릴라들이 민주주의자로 변신한 것은 무장투쟁 혁명이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민주주의자로 거듭난 것은 이유가 있다. 인권유린과 반대파 암살의 독재체제를 겪으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가치를 깨달은 것이다.
우루과이 도시 게릴라 호세 무히카는 “자유민주주의는 목숨을 걸고 지킬만한 것”이라 강조했다. 서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는 그 사회를 살만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대통령,
가장 사랑받는 대통령 무히카는 작은 농가에서 낡은 승용차를 타고 살면서 급진적으로 사회를 바꾸려 시도했다.
마리화나를 합법화 해서 마약카르텔을 무력화 시켰고,
동성결혼을 허용했으며
낙태와 인공유산도 법으로 보호했다.
그 자신이 봉급의 90%를 미혼모를 위해 기부했다.
국민들은 그를 pepe(할아버지)라고 부른다.
사진출처 및 무히카의 더 자세한 내용은 요기에서
- 2017년 현재 우르과이 대통령은 pepe의 아내이다.
3. 신자유주의 빼고 다~ 한다. 포퓰리즘 –베네수엘라 차베스
1992년 실패한 쿠데타 수장 차베스 중령은 국민과 동지들을 향해
“쿠데타는 실패했고 지금은 유혈사태를 막아야 할 때이며,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진다”
는 방송을 한다.
출처 실시간 뉴스
빅 뉴스였고 그는 국민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다.
1989년 유가 폭락으로 베네수엘라 경제가 곤두박질치고 버스요금이 두 배로 뛰자 국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정부는 계엄령을 내리고 시민들에게 발포했다. 카라카스 충돌 이때 충격을 받은 민주적 성향의‘(자기 국민에게 총을 겨누는)저주받은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들은 대통령이 미국주도 국제통화기금을 받아들인 것에 강하게 분노했다.
하지만 차베스의 쿠데타는 실패했고 수감되었다. 그러나 페레스 대통령이 횡령으로 탄핵되고 새로 선출된 칼데라 대통령은 ‘페레스의 정책 실패가 쿠데타를 낳았다’고 말한 바 있다. 차베스는 2년2개월 만에 석방된다. 차베스가 정당을 만들자 기존 정치에 불신하는 좌파 정당들이 속속 합류하여 1998년 선거에서 압승한다. ‘난세가 포퓰리스트를 만든 것이다.’
차베스는 2013년 사망할 때까지 14년간 새로운 유형의 민주주의를 실험했다. 그의 행보는 “자유민주주의만 아니면 뭐든지 좋다”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에서는 ‘신 자유주의’만 아니면 뭐든지 좋다고 했다.
좌파 군인이었지만, 여러 유형의 국민투표를,
언론은 자유를.
국민소환제도 실시,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도 석방했다.
한편, 외국 자본 기업들을 국유화하고 노동자가 직접 운영하는 협동조합도 획기적으로 늘려나갔다.
석유에서 얻은 소득으로 도시빈민을 위한 복지정책을 추진했다. 남미 국가공동체를 만드는 엔진이었다. 9개 좌파 국가정부가 힘을 합쳐 미주자유무역지대 협상을 중단시켰다.
차베스는 재임기간 내내 국영방송을 통해 국민들과 직접 소통했다. 매주 일요일 11시에 시작되는 이 프로그램의 사회는 차베스 자신이었고 대체로 오후5시에 끝나곤 했다.
4. 유토피아 대신 ‘생애 첫 강낭콩 한 접시’-브라질 선반공 룰라-
파업에 성공한 노조지도자 룰라는 노동자 정당이 아니면 누구도 노동자 편이 아님을 깨닫고 최초의 빈민들의 노동자 정당을 만든다. 80년대 내내 노동자당은 사회운동의 에너지를 흡수하면 성장한다. 하지만 집권하지는 못한다. 노동자당이 30%의 지지를 넘어서지 못하자 우파와의 연합한다.
아무나 우리 편
유토피아를 추구하는 대신 ‘생애 첫 강낭콩 한 접시를 제공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았다. 2002년 드디어 4수생 룰라가 대통령에 당선된다.
- 이후 룰라는 수많은 차선을 선택하며 ‘적을 만들지 않는’ 외줄타기로 좌우를 오가며 성장과 분배를 모두 이루었다.
남미연합 주도
2003년 전체 25%이던 빈민이 2011년 11%로 줄었다.
미국과도 실용적 관계를 맺었다. 2008년 남미국가연합 창설을 주도하고 2010년 라틴아메리카 카리브해 국가 공동체 창립을 주도했다. 2010년 87%의 지지를 받았다.
기울어진 세계의 균형을 잡는데 기여한 정부- 에릭 홉스봄
룰라정부는 세계 시장만능주의의 역사의 시계추를 왼쪽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 정부로 평가받는다.
룰라의 뒤를 이은 호세프 대통령은 고전한다. 룰라도 번번이 실패한 정치개혁을 이루어야 했다.
- 1979년 당시 독재정권이 민주화 세력의 요구에 따르면서 민주세력의 결집을 막기 위해 선택한 극단적 다당제로 30여개나 난립한 정당들을 정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강력한 리더십이 필요했지만 노동자당도 스캔들에 휘말린 상태였다.
탄핵
부패척결은 국민들의 강력한 요구였고 호세프는 사법당국이 룰라를 강제구인하기까지 하며 여야를 막론하고 칼을 휘두르며 공정성시비가 있을 때조차 입을 다물었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소극적 원칙을 지킨 것이다. 결국 부패한 우파정치인 모두가 똘똘 뭉쳐 대통령을 탄핵한다.
다음 대통령이 된 테메르에 따르면 호세프가 탄핵된 진짜 이유는 국제자본과 브라질 재계가 원하는 수준의 긴축재정을 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아침에 노동권이 무너졌다. 테메르 자신도 뇌물수수로 기소되고 국민 81%가 그의 사임에 찬성했지만 입법부와 연방하원을 장악한 우파들은 재판마저 막아버렸다.
룰라는 13년간 노동자 당이 이룬 성취를 지키기 위해 대선출마를 선언했다.
2017년 7월 부패혐의로 10년형을 받았음에도 지지율이 38%까지 올랐다.
감동드라마[남미정치] 6. SNS 게릴라 등장. 소수자는 영리하다. 멕시코 인디언
새해 첫날 낫들고, 총들고 헐쭘한 사파티스타게릴라가 도시를 기습 점령했다.
사진출처: 나무위키 미러
“우리는 컬럼버스 이후 쭉~~ 투쟁 중!”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도 반란은 끊이질 않았다.
1712년 낫과 괭이로 무장한 마야족 3000명이 관리와 사제들을 목 베고 산크리스토발로 진격했다. 군대가 그들의 주모자를 효수했다.
1868년에도 반란이 있었고 1994년 1월1일에 피아파스 원주민 3000명이 대지주와 주정부를 규탄하며 산크리스토발을 비롯 5개 도시를 점령했다. 봉기이후 협상장에 나온 원주민 게릴라 마리벨은 자신이 502살이라고 답했다. 1492년 컬럼버스 이후 투쟁해 왔다는 의미이다.
치아파스 봉기이후 멕시코 전역이 들썩였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져 “원주민 형제를 죽이지 말라”는 현수막이 걸리고 “학살을 중지하라”고 외쳤다.
대통령은 연방군을 파견하면서도 멕시코의 국제적 위상을 걱정했다. 나프타에 가입하고 OECD에 가입할 나라에서 원주민 무장봉기가 일어나자 세계가 대서특필했다.
적기인 셈. 우리도 88올림픽 전 해에 서울의 봄이 일어났지 전쟁은 11일 만에 끝났고 정부는 원주민들을 교전세력으로 인정하고 두 달도 안 된 시점인 2월21일에 평화협상을 개시한다. 멕시코 시민사회가 치아파스 게릴라에 즉각적인 연대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이다.
1910년~ 멕시코 혁명이 만든 1917년 헌법은 당시 가장 진보적인 헌법이었다. 소수 엘리트들의 신식민지인 멕시코 농민들은 토지를 분배받고 노동자는 노동3권을 보장받았다.
1929년 혁명지도자들이 만든 제도혁명당은 노동자,농민,중산층,군대 모두를 끌어들였다. 모든 이익조정과 관직배분이 당 내부에서 이루어졌다. 별도의 정당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페루의 자유주의 작가 바르가스 요사가 “완벽한 독재”라고 말한 정당이다.
58년 파업하던 노동자들, 68년 시위하던 대학생들을 학살하고도 좌파적인 정책을 취하여 반발을 즉각 차단했다. 정치성장 경제성장을 모두 이루었다. 하지만 80년대 외채위기로미 자본IMF는 이런거 눈뜨고 봇봄 구제금융을 받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해야 했다.
제도 혁명당도 분열되고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농민들은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 농산물 앞에 망연자실했다. 멕시코 경제가 미국 경제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NAFTA 체결은 멕시코 혁명의 진보적 유산을 모두 포기하겠다는 선언으로 비쳐졌다.
사파타와 원주민3000명이 목숨 걸고 싸워 만든 헌법27조
1992년 살리나스 정부는 일방적으로 혁명헌법 27조를 개정해 토지를 마음대로 사고 팔 수 있게 했다. 중,소농민들이 미국의 저가 농산물과 대지주들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헌법27조는 혁명당시 사탕수수 농민 사파타가 목숨 바쳐 얻은 것이었다. 사파타는 땅을 빼앗긴 원주민과 혼혈농민 3000명을 규합해 연방군을 무찌르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혁명 후 정부가 토지 분배를 머뭇거릴 때 직접 대지주의 땅을 몰수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때문에 게릴라들은 자신들을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라 불렀다.
원주민들이 국제적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원주민들은 대안세계화 운동을 벌이는 전 세계 지식인 운동가들을 정글로 초대했다.
치아파스 라칸돈 정글 오지에 4000명의 좌파 지식인들이 몰려들었다
공산주의 몰락이후 최초로 열린 국제적 저항집회였다. 그 이후 이 국제적 저항운동은 활발하게 펼쳐졌다.
주제: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2001년 세계경제포럼에 저항하는 제1회 세계사회포럼이 브라질에서 열렸다. 이 포럼의 주제는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였다.
- 사파스티아 부 사령관 마르코스 [사진 출처: 시사인}
이 같은 일이 가능한 것은 사파티스타들이 시민사회와 소통하는 게릴라였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멕시코 정치가들은 원주민 게릴라의 요구를 거부했다. 2003년 사파티스타들은 연방의회가 가로막은 ‘자치’를 직접 실천에 옮기겠다고 선언했다.
멕시코 원주민 봉기는 1980년대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현상이 되었다. 과테말라의 이오스 몬트는 400개가 넘는 원주민 마을을 불태우고 살해했지만, 이 나라의 마야족 원주민은 더 열성적으로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마야족 여성인권운동가 멘추가 9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90년 에콰도르에서 시작된 원주민 시위는 중요한 정치적 운동이 되었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편 부카람대통령을 퇴진시켰다. 볼리비아는 최초로 코카나무 농부 원주민 모랄레스를 대통령에 당선시켰다. 모랄레스는 “코카는 코카인이 아니다”라며 미군과 볼리비아군의 코카단속에 저항하여 다양한 시위를 진두지위했었다. 2016 년 사파티스타들은 2018년 대선에 여성 원주민 후보를 출마시키기로 결정했다.
7. 사회운동의 진화-멕시코 마르코스
출처요기
1994년 1월 1일 사파티스타민족해방군이 치아파스의 산크리스토발을 점령했을 때 원주민 사이에는 원주민이 아닌 사람이 한 명 있었다. 총이 아닌 마이크와 인터넷으로 무장한 이 게릴라가 바로 부 사령관(sub) 마르코스이다.
봉기직후 정부는 그를 외국출신 폭력 전문가라고 불렀다. 과테말라?, 쿠바?, 유럽인? 의혹이 많았지만 그는 멕시코의 도시 인텔리였다. 1968년 대학생 중심의 대규모 시위를 제도 혁명당은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학살’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민족해방군으로 등장한다. 마르코스도 대학졸업 후 좌파 비밀 혁명조직에 가담해 활동하다가 1984년 치아파스로 떠났다.
민족해방군은 도시게릴라였으나 도시에 지원네트워크를 만들어 놓은 후 라칸돈 정글에 게릴라 거점을 세웠다. 당시 모렐로스 주의 농님들은 대지주들에 밀려 질 좋은 토지를 분재받지 못하고 라칸돈 정글로 이주해야 했다. 그런데 대 지주들이 목장을 만들면서 이 마저도 빼앗으려했고 사병집단인 ‘백위대’를 동원해 원주민을 죽이기 까지 했지만 정부는 대지주를 비호했다. 원주민들이 라칸돈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게릴라를 찾아간 것은 바로 그런 때였다. 그렇게 멕시코 좌파 게릴라와 원주민이 만났다. 이 원주민들로 구성된 사파티스타 혁명위원회의 군대조직이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이고 그 책임자가 마르코스 부사령관이었다.
혁명은 하지만 정권장악은 싫다. 우린 대표도 아니다.
그들의 목표는 권력이 아니었다. 정권을 장악하고 혁명군으로 변하는 것을 최악으로 여겼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자치의 민주적 공간이었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자신들이 전위 즉 전체가 위임한 대표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멕시코 인민의 대표가 아니므로 ‘만남’, ‘회합’을 중요시 여겼다. 이들이 멕시코 시민사회와 만난 것이다.
마르코스는 심지어 자신이 부득불 무기를 들었지만 무력을 통한 투쟁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다양한 각자의 저항수단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코스가 선택한 무기는 전쟁+ 언어였다. 그는 “내 직업은 전쟁을 하면서 편지를 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부사령관이자 대변인이었다. 최초의 사이버 게릴라 마르코스의 편지는 세계 수많은 사람들에게 발송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버져갔다.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멕시코 정부를 완전히 포위하고 승리를 거두었다. 2000년 멕시코 민주화 이후 이들은 정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자치운동을 벌여왔다.
서평소개
[늙어감에 대하여-저항과 체념사이에서]장 아메리. [죽음이란 무엇인가]-셀리게이건
독일과 일본 제국이 거의 성공할 뻔 했었다./ 평화는 여자들 덕분에 [문명과 전쟁5]
“ 희생이 사랑이라고요? “ [ 깨어나십시오!] 앤소니 드 멜로. 서평
“그에게 사랑받는 특별한 존재이고 싶어요?” “ 어리석네요ㅠㅠ! “ 앤소니 드 멜로 [서평]
커퍼cupper가 알려주는 커피의 맛? 쓴 커피는 버려라!
[문명과 전쟁4] 중세이후,역사는 말(馬 )의 기록. 기마민족의 얘 업은 아낙네가 보병들 보다 빠르다?
[문명과 전쟁] 서평3. 숫자싸움: ‘시민’의 등장과 일부 족장이 제국을 이루기까지
[문명과 전쟁] 서평 2, 농업혁명 VS 목축부족
[문명과 전쟁] 서평 1, 농경이전 수렵채집인은 평화로왔나?
[소문의 벽],[광장],[한강],[전환시대의 논리]- 소설가와 시대정신
[청원] 국립공원에 그냥 들어 Gazua!!!
서양 성당건축의 이해. 스페인여행과 수채풍경화
중국에서 일어날 뻔한 산업혁명? [노동 성 권력],[총균쇠], [전쟁의 세계사] [문명과 전쟁] 비교분석
[노동,성,권력],서평. 인류의 여성혐오사 , SeX 와 혈연의 문제
[ 피로사회],[ 우울사회]. “꿈을 찾지 마라!” 너를 착취하는 보스의 배후는 너 자신의 긍정성이다
[불평등의 대가] “ 미국인 몇이 전 세계 저소득층을 쓸어버렸다.”
시오노 나나미 비판, [르네상스를 만든 사람들] n [총균쇠], [문화와 전쟁]
자본의 탐욕과 노동자의 소외- “경제는 이론이 아니다. ‘의지와 결정’의 문제다.”- 장하준 [경제학 강의]
탐욕스런 가해자의 기만적 경제이론과 그 피해자들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인구수 비례 세계 최강 올림픽 메달 국가는? [사회주의 100년]요약
*봄이어요…소심하고 성질 더러운 뉴비가 상처받고 포기하지 않도록
오늘도 ..리스팀 을..^^~~ 또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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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팅소녀 이미지는@cheongpyeongyull 님이 그려주신 작품입니다.감사드립니다
‘[오마주]프로젝트로 재 발굴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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