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스파르타쿠스를 모두 봤습니다. 한 달 걸렸습니다. ^^19+ 금, 잔인성,폭력성,선정성.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사건이죠.
스파르타쿠스에 떨었던 로마가 곧.공화정을 끝장내고 강력한 황제가 등장하는데 동의하게 됩니다.
- 영웅 스파르타쿠스
- 미드 [스파르타쿠스]에 얼굴과 뒤통수
- 스파르타쿠스의 꿈.
- 크라수스의 엄첨난 부
- 크라수스 vs 스파르타쿠스
- 종결: 스파르타스의 죽음과 기록
- 카이사르의 등장과 크라수스
- 스파르타쿠스 이후
참조: [스파르타쿠스전쟁],
[로마인이야기],
[갈리아전쟁기]
1. 영웅 스파르타쿠스
냉정하게 ‘ 사실’만을 언급하기고 유명한 배리 스트라우스 교수는 책 <스파르타쿠스 전쟁>에서‘추측’이란 단서를 붙이면서 전개한 이야기를 참조합니다. 패자 스파르타쿠스는 오늘날 전해지는 문헌이 별로 없고 그나마도 승리자인 로마의 입장에서 서술되어서 왜곡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인이다. 그는 로마의 보조군으로 복무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검투사로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이후 반란군의 지휘자로서 엄청난 능력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스파르타쿠스는 기원전 73년 봄 검투사 양성소를 탈출했다. 이후 그를 추격하는 두 명의 법무관을 격파했으며 이어서 파견된 두 명의 콘술(집정관)을 양면에서 상대하면서 궁지로 몰아넣었다.
그는 갈리아 속주 총독(전 집정관) 군단을 돌파했다.
최후로 그는 로마가 파견한 독재관(프로콘술 임페리움) 크라수스를 맞아 싸웠다. 그를 바다로 쓸어 넣으려는 크라수스와 그는 맞섰다. 결국 알프스를 넘거나 바다를 건널 방법을 찾지못한 그들은기원전 71년 봄, 돌연 크라수스를 향하여 정면에서 최후의 돌격을 감행하기까지 그는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시기적으로 폼페이우스를 비롯한 로마의 유능한 장군과 강군이 ‘밖’에서 싸우고 있을 당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상당히 운이 좋거나 정보에 밝았다고 봐야한다. 미드에서는 크라수스를 매우 유능한 명장으로 그리지만, 역사적 평가는 그를 상술 뛰언난 부자로 표현한다. 이 부분은 뒤에 자세히 서술할 계획.
스파르타쿠스는 한 때는 남부 전역을 장악했다.
그의 이러한 승승장구는 계급투쟁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인 로마원로원과 대농장(라티푼디움)을 소유한 지주들에게 땅을 빼앗긴 몰락 농민들의 불만 덕분이었다.
한 때는 대규모 진압 군대까지 격파했으나, 투쟁 노선대립으로 인한 내분 등으로, 진압당했다.
6,000명의 포로들이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형으로 공개처형당했다.
미드에도 살짝 나오지만 당시 포로들의 계급투쟁을 군대의 힘으로 진압한 크라수스가 “스파르타쿠스가 누구냐”고 묻자, 서로 자기가 스파르타쿠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는 억압받는 노예들의 영웅이었다.
무시당하는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 전쟁]은 당연히 그에게 합당한 연구과 서술을 바친다. 그러나 그 외에 [로마인이야기] 역사소설에서는 콤모두스나 술라, 이름도 기억하기 힘든 수 많은 동로마제국의 한심한 황제들에 대해서는 지루할 정도로 서술하던 시오노나나미가 이 노예혁명에 대해서는 한쪽으로 짧게 진술한다. 그 절절한 아내사랑이며 투쟁기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시오노나나미의 시각이 너무 로마 주류 보수의 색안경이 강한게 아니었을까.
처음 로마인 이야기를 읽을 때는 몰랐지만 [로마제국 쇠망사] 나 그의 책 [남자들에게]를 읽고 보니 그의 줌마 편협성이 자꾸 보인다.
2. 미드 [스파르타쿠스]에 얼굴과 뒤통수
시종일관 주인공의 아름다운 아내 수라를 향한 끝없는 사랑도 드라마의 한 에너지 축이지만,
미드는 첫 시즌부터 줄 곳 검투사 양성소와 검투장을 둘러싼 잔인하고 자극적인 살인, 전투 신과 로마인들의 노골적 섹스장면으로 시청률을 붙잡는 모양새다.
하긴 한 명의 검투사가 영웅으로 거듭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사실 이것이 이 드라마의 핵심 주제이다. 하지만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켰으면 적당히 퇴장도 시켜야한다.
4시즌에 이르면 드디어 반란군과 진압군 크라수스의 행보가 드라마의 주제로 등장한다. 당시 지중해의 강자 카르타고를 무찌르고 유럽 최강을 자랑한 로마 정규 군단, 갈리아(프랑스)도 몇 개 사단에 무너뜨린 그 로마군을 상대로 검투사 70명으로 시작한 스파르타쿠스는 2년간 계속해서 승리한다. 물론 스파르타쿠스는 로마군을 상대로 대 회전은 거의 하지 않았다. 야습이나 기습을 하고, 구릉지대 등으로 이끌어낸다. 모든 걸 감안해도 사실 불가능한 일이다.
로마는 기본적으로 모든 공직에 있는 이들은 ‘군’을 거치며, 백부장 등 18년 이상 군에 복무하는 정규군은 베테랑인 경우가 많다. 또한 로마가 유럽을 제패한 이유는 결코 개인적 무용이 아니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듯, 어디를 가든 로마 군대는 본토의 충분한 보급을 받았으며, 철저하게 준비하고 전투에 임하면 단기간 내에 전투를 승리로 종결짓곤 했다.
로마인의 군단에 대한 자부심은 성역이었다. 보급도 받지 못하는 도망자 검투사 반란군을 로마 정규군이 이기지 못했다는 사실은, 로마인들에겐 수치였다.
3.스파르타쿠스의 꿈.
사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은 처음부터 파멸을 향한 전진이었다. 영화에서도 말미에 나오지만, 그는 이탈리아를 떠나 흩어지고 사라지는 시도를 한다. 첫 번째 시도는 알프스산맥을 넘는 것이었다.
문헌에 따르면, 로마군에 연승한 그는 북으로 올라가서 알프스산맥을 코앞에 두었다가 다시 남으로 내려온다.
이에 대해 밝혀진 사실만을 언급하는 베리 스트라우스의 책<스파르타쿠스 전쟁>은 스파르타쿠스가 무리에게 목적지를 가르쳐주지 않다가,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이야기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알프스산맥을 넘는 일은 한니발처럼 대담무쌍한 장군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게다가 당시 반란군의 대다수는 스파르타쿠스처럼 외국인이 아니라, 이탈리아에서 나고 자란 노예들이다.
스파르타쿠스는 노예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공화정으로부터의 해방을 원했으나, 대다수의 노예들은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로마군을 상대로 연전연승했다. 승리는 기쁨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대해 눈멀게 한다. 스파르타쿠스는 신의 사랑을 받는다는 추앙과, 엄청난 카리스마를 지녔으며, 무적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러나 아무리 그라도 대다수의 반란군들의 반발에 어쩔 수 없이 남쪽으로 진로를 돌렸을 것이라는 것이 <스파르타쿠스 전쟁>의 추측이다.
로마는 스파르타쿠스를 상대하기 위해 크라수스에게 군대를 동원할 수 있는 권한을 준다. 크라수스는 2개 ~8개 군단을 조직했다는 기록들이 있으니, 최소 4~10만명 이상을 동원한 듯하다.
4. 크라수스의 엄첨난 부
2008년 포브스 지가 선정한 역사상 최고의 갑부 8위로 202조원, 당시 로마제국 1년 총 예산에 육박했다.
마리우스 - 술라의 내전 중에 마리우스파에 의해 살해당한 장군 크라수스의 아들로, 킨나의 술라파 박해를 피해 도주했던 그는 술라의 2차 로마 진격 당시 휘하의 무장으로 합류, 술라 휘하에서 큰 공적을 세웠다. 이후 술라의 오른팔이 되어 숙청당한 반술라파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서 큰 재산을 벌었으며, 그 외에도 권력을 이용하여 임대업이나 부동산 같은 여러 가지 사업을 벌여 부를 쌓았다.
전문 노예들로 이루어진 단체를 거느렸으며 전문인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노예들을 빌려주는 사업을 했고, 설계가 영 좋지 못한 건물이나 화재로 타버린 건물을 싼 값에 사들여 수리하고 개축하여 되파는 사업을 했다. 하지만 그의 사업 중 가장 유명한 것으로 알려진 소방소를 매수해서 불 끄는 것을 일부러 늦추는 사이 불에 탄 집을 싸게 사들인 이야기가 실제라는 증거는 없다.
훗날 카이사르-폼페이우스와 함께 제 1차 삼두정치를 이끈 로마 최고 재력가 크라수스는 군사적인 영예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는 유능한 군인들을 끌어 모았을 것이다. 그는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할 때 필요한 모든 군대에 필요한 돈을 융자해 준 장본인이다.
5. 크라수스 vs 스파르타쿠스
스파르타쿠스는 당시 6만~10만 정도의 추종자를 이끌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로마군의 최대 강점인 로마 가도를 통한 엄청난 물류 후송지원을 받는 정규군의 인적, 물적 인프라에 비하면 숫자는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로마 군단 앞에 적의 숫자는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스파르타쿠스는 그런 상황에서도 오랫동안 크라수스와 교전한다.
하지만 운명은 스파르타쿠스의 편이 아니었다. 그가 알프스산맥을 눈앞에 두고 다시 돌아가야 했던 것처럼, 시칠리아를 눈앞에 두고 그는 배가 없어서 건너질 못한다. 해적들에게 거금을 주고 협상하는 일도 성공하지 못한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보복을 두려워할 만한 신용을 획득한 적은 없는 무리였다. 뗏목도 만들어보지만, 겨울철이라 무용지물. 결국 다시 돌아온 그는 마지막 결전을 준비한다.
6. 종결: 스파르타스의 죽음과 기록
스파르타쿠스의 마지막은 결연하였다!
미드에는 안 나오지만, 그는 결전을 앞두고 동료들 앞에서 자신의 말을 죽여버린다. 그의 절박함을 표현한 것이다.
그는 결사대를 조직해서 크라수스를 향해 돌진한다. 스파르타쿠스는 미드에서 처럼, 한 번에 백인대장 두 명을 죽일 정도로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그는 어차피 크라수스와의 정면 대결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휘하의 군대 중에서 정예만을 선발해 크라수스만을 목표로 돌진해 간다.
스파르타쿠스와 검투사들은 초인적은 힘을 발휘해서 로마군을 베어 넘기지만, 결국 한 두명씩 로마군의 칼날에 땅에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마침내… 스파르타쿠스마저 크라수스 앞에 다다르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미드의 멋진 마지막 장면은 설정이고, 그의 마음속의 꿈같은 일이 아니었을까…영웅을 죽을 지언정 사랑하는 이들은 (배는 못 태웠지만) 알프스를 넘는다.
그는 반란이 성공해서 이탈리아를 떠나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함께 한 동료들과 함께 살아남는 미래를 꿈꿨을 것이다. 그랬다면 역사의 기록에 남기가 더 힘들었을 것이다.
제국간 전쟁에서도 패자의 명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당연한 역사에서
무려 450년 동안이나 존속된 대제국 로마를 상대로 2년이나 본토에서 휘저은 한 노예가 지금까지 역사로 살아 남았다는 것은 결코 폄훼할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실패함으로써 기록으로 살아남았을 것이다.
역사는 말하지 않지만, 그가 만약 한니발처럼 훈련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가 해적들과 교섭에 성공해서 이탈리아 반도에서 떠났다면? 역사에 if가 허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미드 스파르타쿠스]는 잔인한 피의 격투와 섹스 넘치는 장면들로 우리에게 어필하겠지만, 예전에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불멸의 명성을 누리며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제공하고, 자신을 억압하는 모든 것들과 싸우는 이들의 대표주자로 충분해 보인다.
7. 카이사르의 등장과 크라수스
4시즌, 영웅 아킬레우스 같은 카이사르의 갑작스런 등장에 깜짝 놀랐다. “어찌 감당하려교 이런 무리수를….” 하고 생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로마 최고의 영웅을…..
외모에서 풍기는 인상도 너무 달라서 당황스러웠다.
카이사르
미드에서는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의 아들의 부장으로 카라수스의 아들과 갈등 관계를 그린다. 매우 무예도 뛰어나고, 모험적인 작전으로 스파르타쿠스를 무너뜨리는 핵심 영웅 중 한 명으로 그려진다.
로마 역사상 가장 유능한 장군인 카이사르도 그렇게 무모한 도전에 순응할 만큼 무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도 잠입하는 로마의 첩자는 다른 사람으로 그려진다.
아무튼 미드 스파르타쿠스는 철저한 흥미 위주의 연재 드라마이니 그 정도 자극적인 (브레드피트 닮은 토드 산라스)의 극적인 모험 정도가 필요했으리라. 인정. …하지만 굳이 카이사르 까지 등장시켰을까….
한편, 크라수스는 카이사르를 침투시키는 등 모든 작전을 계획한 대단한 지략가로 그려진다. 미드 4시즌 최고의 주인공이다. 시오노나나미의 [로마인이야기]나 다른 역사소설과는 전혀 다른 평가이다.
역사적으로 검증하면 가능한 일이긴 하다. 당시 카이사르는 그 정도 지위의 로마 장교였다.
역사적으로도 문제는 없다.
BC 73~ 71 스파르타쿠스의 반란과 격파
BC 70.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공동 집정관 당선
BC 66.~58 카이사르 갈리아원정 (크라수스 융자)
BC 59 카이사르 집정관 당선 (1차 3두 정치)
BC 55. 크라수스, 폼페이우스 2차 집정관 당선 (파르티아와 전쟁)
BC 53 카르헤 전투 (크라수스 사망)
BC 49 카이사르 루비콘강을 건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 타도,권력 장악)
BC 44 카이사르 암살
73년에 카이사르가 크라수스와 친분을 쌓았을 수도 있기는 하다. 영화처럼 극적인 장면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카이사르가 매우 호색한인 건 맞지만 매우 정치적이고 신중했으며, 충동적인 터프마초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게 역사적 평가가 아닐까.
크라수스를 영웅으로 그린 일도 드라마상 필요했겠지만, 역사적으로는 좀 멀리 간듯하다. 훗날의 일이지만, 크라수스의 마지막 파르티아 원정 전투를 보면 그다지 대단한 지략가는 결코 아닌듯하다. BC 53 카르헤 전투에서 그는 파르티아에게 네 배의 병력으로도 로마 사상 최악의 패배를 당하고 아들도 사망하고 본인도 사로잡혀 사망한다.
실제로는 막강한 돈과 전투력에 밀려 궁지에 몰렸으며 벗어날 길은 전혀 없었다는게 역사적 사실일 것이다. 철벽이 둘린 궁지에 몰린 사자들. 그들의 모습을 실제로 그렸어도 좋았을 것이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크라수스는 스파르타쿠스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8. 스파르타쿠스 이후
스파르타쿠스전쟁의 저자 스트라우스도 스파르타쿠스의 아름다운 아내에게 주목한다.
스트라우스에 따르면, 그녀는 디오니소스 무녀로 보인다.
트라키아 여인은 스파르타쿠스를 신이 점지한 사내로 예언했다고 한다. 스파르타쿠스가 주로 활동한 무대는 남부 이탈리아의 산악 지대였는데 이곳은 대규모 농장이 많아 무장한 목축 노예들이 많았고, 또 디오니소스 신앙이 널리 퍼진 곳이라 한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에 디오니소스 신앙이 개입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파르타쿠스의 반란이 실패로 돌아간 뒤 고대 세계에 찾아온 것이 바로 기독교이다. 헤겔은 <정신현상학>의 ‘자기의식’ 장에서 노예가 노동을 통해 자기의식을 찾았으나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자 노예는 불행한 의식에 빠지고 그것이 기독교의 기원이라 말한다.
자유를 찾으려던 노예들의 반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그 기억은 남아있다. 그 역사적 기억은 인류 역사의 트라우마이다. 반란의 쾌감과 좌절의 죄책감이 그 기억을 둘러싸고 있다. 로마에 기독교가 유입되기 직전의 상황으로의 설정으로 적당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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