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기생충’은 다양한 장르를 오가는 ‘봉준호장르’ 영화지만
기본 메시지는 분명 사회경제 불평등의 문제를 다룬 영화입니다.
얼마전 같은 메시지로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스티글리츠의 책 [불평등의 대가 - 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를 참조하면서 영화평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긴글 주의 ,
줄거리 스포는 거의 없습니다.
차례부터 밝힙니다.
마지막에는 유튜브에 간략 본 올린것 첨부 합니다.
- 영화에 대한 호평들 정리
- 계급인식, 선한 고용주- 부자는 착해!!
- 강요된 자아상, 혐오, 냄새
- 계급의 벽, 꿈 꿀 권리- 산경수석, 신발
-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
- 공생하기
□참고서적
세바스티안 둘리엔 [자본주의 고쳐쓰기]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조지프 스티글리츠 [불평등의 대가]
알랭드 보통 [불안]
피게티 [21세기 자본]
봉준호 감독이 계급 문제를 다루는 방식은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되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영화에 쏟아지는 찬사들이 의아한 한국인들이 있다는 사실이 씁쓸한 자괴감으로 다가오는 우울한 아침입니다. 그 ‘배신당한 기대감’들이 혹, 픽션이 다큐가 되어버린 한국사회의 현 주소에 경종을 울리는 현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감상평을 정리해 봅니다.
이 씁쓸함은 영화가 평범한 코미디나 스릴러물로 읽혀 황금종려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평이 의미하는 메시지 때문입니다. 영화 ‘기생충’의 리얼리티가 한국사회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에는 그저 그런 일상일 뿐이라는 슬픈 내면화를 말하는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입니다.
즉, 기생충, 그 영화 같은 현실을 그린 리얼리티의 당사자가 되어버린 슬픔입니다. 웃어야하나.ㅋㅋ 본 글은 영화 ‘기생충’에 대해 그동안 진보적 사회경제학자들이 우려했던 부의 양극화사회의 문제점을 중심으로 드러낸 메시지의 발언 방식에 대한 감상평입니다.
1. 영화에 대한 호평들
“‘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담은 풍자이자 환상적인 영상미와 대담한 미장센, 배우들에 대한 최고의 디렉팅이 담겨진 걸작”-호주와 뉴질랜드 배급, 매드맨(Madman)
“당신의 피부 아래로 파고들어와 이빨을 박아 넣는 영화”-데일리 텔레그래프.
“활력 있고 타이트하게 조율된 코미디, 무척 한국적이면서 동시에 철저한 완성도를 가진 스토리로”스크린 인터내셔널
“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공포에 관한, 현실에 단단히 발을 붙인, 재미있고 웃기면서도 아플 정도로 희비가 엇갈리는 한 꾸러미. 봉준호는 마침내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인디와이어
“단일 카테고리로 정의할 수 없는 영화들로 유명한 이 장르 변주의 신은 코미디, 호러, 드라마, 사회적 발언, 크리처 영화, 살인 미스터리, 채식주의의 성명서와 같이 장르의 계단을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밟아왔다. ‘기생충’ 또한 이 리스트의 절반 이상에 해당할 구간을 오간다. 하지만 우리가 보아왔던 그 어떤 전작보다, 웃음은 더 어두워졌고, 분노의 목소리는 더 사나워졌으며 울음은 더 절망적이다. 봉준호가 돌아왔다. 가장 뛰어난 형태로” -버라이어티
“ 칸 영화제에서 부족했던 모든 것. 촘촘하고 오락적이며, 완벽한 페이스를 보여준다. ‘기생충’을 보며 당신은 웃을 것이고, 비명을 지르고, 박수를 치고 손톱을 물어뜯게 될 것이다”BBC,
극단적 양극화로 치닫는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는 많습니다. 책과 소설, 영화, 그림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가들의 경종의 소리가 지난 200년간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기생충’은 그 양극화의 문제를 가장 심플하면서도, 노련한 상징과 미장센, 충격적 연출을 버무려 슬픈 유머 속에 아프게 박아 넣었다고 호평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슬픈 표정을 짓지 않고,
부자들을 선망하며
당연한 듯 살아가는 일상의 모습입니다. 어느정도 우리 자신의 모습이지요. 하지만 결국 존재가 거부당하고 선 긋고, 유배당하고 바퀴벌레로 취급당하고 있는 현실을 자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똥물을 소방호스처럼 뿜어내는 지하세계의 변기 뚜껑을 누르고 앉아서도 와이파이를 잡은 카톡을 통해 상류사회의 가든파티에 접속해야하는 극단적 대비가 우리사회의 모습이라는데도 덤덤할 수 있다니요.
“광대가 나오지 않는 코미디, 악당이 나오지 않는 비극”-봉준호
2. 계급인식, 선한 고용주
중세에 부자는 죄인이었다.
천국의 바늘구멍을통과하지 못하고
부자의 재물은 썩었고, 불지옥에서 천국에간 거지 나사로에게 물 한방울을구걸해야 할 운명이다. (성경)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고 말세에 빈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며 헛되이 창고를 채운것이다.
18세기 산업혁명이후, 중세귀족 계급이 무너진 나폴레옹시대 이후, 부르주아가 득세하기 시작한 19세기. 초까지 부자들은 비아냥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그들의 재물은 썪었고 좀이 슬었으며 그들의 돈에는 악취가 풍긴다고 외쳤다.
나폴레옹은 세습귀족을 “나라의 저주요 바보요, 세습 멍청이들!”이라고 했다.
루소는땅을 소유한 부자들에 대해 “이 사기꾼들에게 속으면 우리는 파멸할 것이다”고 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공산주의, 사회주의는 자본가를 “도둑”이라고 했다.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기독교, 보헤미안들은 부르주아들의 천박한 가치관을 비웃었다.
일반적으로 계급 갈등을 다룬 사회적 작품들에선 기층 민중은 선하고 기득권 집단이나 사회구조가 그 반대쪽에 등장한다.
지식인들은 가난을 택했고 탐욕에 빠져버린 무뇌한들이 부자가 되었다.(보헤미안들 자기주장-자발적 가난)
하지만 21세기 자본주의사회에서 양극화가 심화되면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고용이 불안해 지면 노조활동은 공격받는다.
빈자들은 더 이상 자존감과 인간성을 유지할 시간도 여유도 없다. 책읽을 시간이 없다.
(부자들은 자녀를 열심히 공부시킨다.)
부자들은 TV 신문을 장악하고 ‘자본이 선’ , ‘소유가 행복’ 이라는 거짓 이념을 흘러 넘치게 한다.
빈자들은 부자들과 자본가들의 가치관을 그대로 내면화 한다.
가장 가난한 빈민들이 기업가를 위한 정당과 법에 투표한다.
부자의 자녀들만이 착하고 인간적이고
가난한자는 무능한, 게으른, 나태한, 기생하는 벌레가 되어간다.
‘기생충’에서 보여주는 하층민의 자기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하층이 악하고 부유층이 선하다. 하층은 고용되지 않았다. 바퀴벌레다. 부자들에게 기생한다. 바로 가난한 사람들의 서로의 가족을 바라보는 자기인식이다.
그들은 어둡고, 습하고, 냄새나는 지하 공간에서 부유층이 내려주는 것들을 받아먹으며 산다. 부자의 평화로운 집 지하에선 벌레들이 서로 부자의 쓰레기를 차지하려 악다구니한다.
고용주인 부유층은 착하고 순수하다. 그 “순진하고 사람을 잘 믿고, 꼬인 데가 없다”, “부잣집 애들은 구김살이 없어. 돈이 다리미야. 돈이 구김살을 쫙 펴준다니까.”
지금까지 부자와 빈자의 인간성에 대한 연구들은 대부분 아무런 결론을 얻지 못했다.
연구결과를 보면, 부자들은 부지런하고 악하고, 게으르거나 선하다. 가난한 자들은 더럽고 게으르고 착하다. 하지만 양극화가 심화되면 이야기가 달라 질수 있다고 영화는 말한다.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며 험한 일 안 해보고 곱게 자란 사람들은 정말 순수할 수 있다. 잘 사는 집안의 아이들은 공부도 잘 하고 심지어 착하기까지 하다.
‘기생충’의 고용주는 우아하고 구김살 없고 상식을 아는 사람들. 막말이나 갑질도 없다. 자기들이 부리는 사람하고도 편하게 대화한다.
이제는 누구나 부자를 선망한다.
아니 돈이 소망의 최 상위 목표가 되었다.
선한 고용주의 이미지는 최근에 경제학과 함께 등장한 자본가들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주장을 열심히 광고했고 결국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문화를 내면화 했다.
그들의 주장은 온당한가? 그렇지 않다.
자본가의 자본은 결코 노동의 결과가 아니다.
중세이후 봉건사회를 몰아내기위해 종교와 국가를 뒤집거나 밀어 준것도 자본이었고 종교와 국가는 자본가을 위한 불평등한 규칙을 만들어 주었다.(나폴레옹 법전은 부르주아를 위한 법으로 가득하다.)
18C이후 상업혁명은 신대륙 ‘약탈’ 속에 이루어졌고 자본은 비약적으로 축적 되었다.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20세기를 넘어서면서 자본은 시민들의 사회, 경제의식을 조종하고자 한다.
자신의 이익을 ‘국가’와 모두의 이익이라고 느끼게 하며
(나라를 위해 자신이 더 성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가와 사회를 뛰어넘어 전세계를 주무르면서 자신의 탐욕을 채우려 하고 있다.
특히 금융시장은 극단적 행동들을 낳는 경향이 있다. 노동시장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낳는 경향이 있다. 이제 해결책은 자명하다.
‘시장은 하인으로는 훌륭하지만 주인으로는 형편없다.’ 시장은 명확한 임무와 한계를 부여해야한다- [자본주의 고쳐쓰기]의 결론이다.
3. 강요된 자아상, 혐오
체취는 나 스스로 느낄 수 없다. 타인에 의해서만 인식된다. 가족들 모두는 서로에게서 발견할 수 없는 냄새가 있다는 사실이 부자들의 코를 통해서만 깨닫는다.
혐오감을 통해서만 인지되는 강요당한 자아상이다.
타인의 구토감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계급의 상징이 바로 지하의 냄새이다. 우리 존재가 혐오의 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인간은 그 혐오의 주체에 분노하고 미워하게 된다.
영화에서 하층민의 자아인식을 흔들어 분노를 일으킨 것은 어떤 말도, 행동도 아닌 바로 냄새에 대한 혐오였다. 내 옷을 끌어 코를 대 봐도 전혀 느낄 수 없는 나의 일부분, 지하실 기생남의 그 냄새에 코를 틀어막으며 혐오를 드러내는 고용주에 억눌렸던 인간적 분노가 순간적으로 폭발한다.
5. 계급의 벽, 꿈 꿀 권리
영화의 두 포스터에서 감독이 노골적으로 드러냈듯이 이 영화는 돈으로 나누어진 계급들 간의 꿈 꿀 권리에 대한 은유를 포함한다. 그 중 두 가지는 신발과 수석이다.
누군가 맨발이면 상대편 계급은 그렇지 않다. 최우식은 계급상승을 끝까지 노리는 등장인물이다. 출세하게 해준다는 수석을 선물받고, 도망치는 날 유일하게 신발을 신고 있다.
수석이 자꾸 자신에게 달라 붙는다며 수몰된 집에서도 수석을 챙긴다. 하지만 빗물 속에 도망치는 가족을 따라잡던 카메라는 쏟아지는 빗물에 완전하게 젖는 운동화를 잡는다. 자신의 꿈이 어쩌면 허황되다는 자기인식일 것이다. 결국 수석에 머리를 맞게 되고, 시냇물에 수석을 돌려 보낸다. 그들에겐 꿈꿀 권리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독백은 허망하다.
계급이 양분화 되면 반드시 ‘선’을 지켜야 한다. 하층의 세계와 자신들의 세계를 가르는 선 그들은 그 선 너머에서 풍기는 지하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구분한다. 선 너머에 사는 ‘것들’에 대한 혐오를 숨기지 않는다. 하층의 터전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폭우가 그들에겐 그저 미세먼지를 쓸어간 즐거운 단비였다.
대만 카스테라, 피자가게 등, 가난한 자들은 이제 많은 실패를 통해 꿈 꿀 권리는 사라졌음을 몸으로 체험한다. 100년 전엔 가능했던 신분이동의 신화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었다. 가난한 자들은 더 이상 노력하지 않는다. 희망은 실망이 되므로 꿈꾸지 않는다.
“무계획이 계획이다. 계획대로 되는 게 어디 있더냐? 계획 같은 것 하면 안 돼”
폭위가 쏟아진 날 두 세계는 완벽한 극단적 대비를 보인다.
시원하게 내리 쏟는 숲 속의 빗줄기 아래 미제 인디언 텐트에 불 밝히는 아이가 있다. 하지만 그 불 밝힘 때문에 바퀴벌레처럼 맨 발로 도망 나와 복잡하게 얽힌 전선줄 사이로 숨어야하는 존재가 대비된다. 수 많은 계단을 통해 내려가면 거기에 쓰레기와 오물로 뒤범벅이 된 지하세계가 존재한다. 온몸으로 누르고 앉은 뚜껑을 밀고 터져 나오는 똥물의 강력한 분수, 그 메타포의 강력함이라니, 프랑스 인들은 봉준호의 은유의 웅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그 대비가 바로 21세기 OECD 회원국의 현재 모습이며 어쩌면 미국, 프랑스의 내일이라는 점이 더 놀라운 메시지가 된다.
폭우 다음 날 화창하고 ‘후레시한 공기’속 가든파티는 모든 것을 잃고 체육관에서 구제옷을 고르는 사람들과 대비된다. 기생충들이 육탄전을 펼치는 극한 상황에서조차 상층은 지하 냄새에 대한 혐오감을 드러낸다.
북미 인디언은 미국 자본주의의 단물에 현혹되어 자연속의 삶과 자존감을 버리고 기생의 삶을 택했다.
부자들에게 기생하며 살려던 주인공의 마지막 자존감이 극단적 삶의 대비를 경험한 날, 냄새라는 사소한 존재 혐오로 인해 폭발한다. ‘온화한 성품’으로 알려진, 분노하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던 50대 무직자 가장의 폭발. 그로 인해 상류층의 평화로운 일상도 파괴된다.
그들을 감싸던 눈부신 햇살 속에서. 가장을 잃고 아이는 문화 충격으로 트라우마에 빠진다. 그리고 한 사람은 어둡고 습한 곳으로 들어가 진짜 기생충의 삶을 시작한다.
냄새혐오를 절대 표시내지 않는 예의바른 부자였다면 결말이 달라졌을까….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두 존재가 그만큼 선과 벽과 지상과 지하로 분리된 사회는 사회 자체가 위험하다는
5.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
ISBN: 9788932916200
조지프 스티글리츠 교수의 저서 [불평등의 대가]-분열된 사회는 왜 위험한가 (국내에 13년도에 발간)는 미국사회를 기준으로 자본주의가 치닫는 극단적 불평등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미시경제학·거시경제학·산업조직론·국제경제학·노동경제학 등 경제이론의 모든 하위 분야에서 새로운 연구의 실마리를 제시하고 그 기초를 다지고, 경제주체 간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빚어지는 비효율 사례로 ‘도덕적 해이’(moral hazard) 개념을 처음 도입해서 노벨 경제학상을 당연하게 수상한 바 있다. 심지어 2002년 한국정부로 부터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에 기여한 공로로 은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한 이 대가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현 사회에 대한 다양한 문제점들을 우려했다.
영화 ‘기생충’은 이 대가의 명저가 10년전 우려했던 현실들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우려보다 더 심각하게 나타났음을 눈으로 확인시켜 준다.
[불평등의 대가]를 거칠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양한 사회적 요인과 함께, 세계화시대에 금융 기관들은 노동자들에게 자본이 철수할 수 있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임금을 낮게 유지했고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큰 수익을 올렸다고 밝힌다. 자신들이 초래한 위기 속에서 변함없이 번창하면서 대규모 패자 집단을 만들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그것 ‘불평등’은 문제가 많다.
성과 유인 보수 체계는 불평등을 심화시킬 뿐 아니라 회적 의무는 금전적인 거래로 바뀌어 버리는 도덕적 헤이라는 역효과를 낳는다.
부의 양극화는 제도적으로 심화되고 이는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법치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점점 깊어지고, 정치 시스템을 자신에게 이로운 방향으로 조종하고자 하는 부유층은 이런 결과를 환영한다, 사회적 자본은 사회를 결속시키는 접착제다. 사람들이 경제 시스템과 정치 시스템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접착 효과는 나타나지 않고 사회는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
영화에서도, 민주주의와 법률 시스템이 대기업과 부자에게만 우위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빈자들은 더 이상 합법적으로 꿈꾸지 않는다. 공문서 위조도 거짓 취업도 거리낌이 없다.
미국의 교도소는 흑인과 가난한 자들로 넘쳐난다.
그리고 경고한다.
하위 99퍼센트 소득층들이 상위 1퍼센트의 농간에 놀아나고 있음을 깨달아 간다. 2011년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에서는 정부가 전복되었고, 예맨, 바레인, 시리아에서는 시위가 일어났다…언젠가는 미국에서도 저런 일이 일어날까?…미국은 이처럼 불행한 나라들과 닮은꼴이 되어 소수 엘리트 계층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다.
영화에서는 온화한 성품의 빈자가 갑자기 부자의 등에 칼을 꼽는다.
[불평등의 대가]는 우려의 말로 끝맺는다.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란 말이 진정한 의미를 발휘하는 사회, 정치 시스템이 살아 움직이는 사회다… 공정성과 기회라는 기본 원칙을 회복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4년 전에 대다수 미국인들이 당당하게 희망을 품어도 좋았을 만한 순간이 있었다. 그때 바로잡았다면 25년 넘게 지속되어 온 추세가 역전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세는 오히려 더 악화되었다. 지금 희망의 불꽃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다.
피케티는 [21세기 자본]에서 심화되는 부의 양극화를 고발한다.
지구상에서 0.1%는 45억중 450만명인데 이들이 전 세계 부의 50%를 차지한다.
미국과 유럽에서 상위 10%가 총 소득에서 차지하는 몫
‘기생충’은 이 경제학자들이 몇 년전 심각하게 우려한 사회를 ing로 보여준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비웃음거리가 된 사회, 부자와 빈자가 완전하게 지상과 지하로 분리된 사회, 서로에게 냄새로, 혐오감으로 선을 긋고 칼을 등에 꼽는 사회를 보여준다. 더군다나 영상들은 아주 사실적이고 현실적이다. 이 모든 것이 평범한 일상의 모습이라는 점, 그리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이 영상에 별로 충격을 받지도, 문제의식을 느끼지도 못한다는 현실을 봐야한다.
영화 기생충은 며칠 집중해고 정리해야 고민에 들게하는 노벨상 수상자의 책보다 더 확실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6. 공생하기
넘을 수 없는 선으로 격리되고, 그 선 너머에 대한 혐오가 도사린 사회는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지속 불가능한 사회다. 자본주의의 풍요는 평등과 선망을 낳았고 그것은 되돌릴 수 없다. 또한 양극화는 탐욕과 함께 기생충들을 생산했다. 평등과 기생충이라는 자기인식은 공존할 수 없다. 때문에 부자가 악인이든 아니든 이 구조는 불안을 잉태한다.
이 불안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해소되어야 한다.
영화의 극단적 결말이 해법을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우려의 목소리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에서는 두 가지 길을 제안했다. 그 하나는 바로 영화의 결말보다 더 극적이다. 부자들의 등에 칼을 꼽는 혁명이다. 또 다른 길은 1%가 스스로 정책을 통해 99%에게 공생의 방법을 제시하고 벽을 어느 정도 허무는 것이다. 기생이 아닌 공생의 세상이 되어야 이 위태로움도 사라지고 사회전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다는 합리적 제안이다.
6.
□참고서적
세바스티안 둘리엔 [자본주의 고쳐쓰기]
리오 휴버먼 [자본주의 역사 바로알기]
조지프 스티글리츠 [불평등의 대가]
알랭드 보통 [불안]
피케티 [21세기 자본]
요약 영상 video
https://www.youtube.com/watch?v=ibZVzYMfJaE&t=34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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