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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관광- 북/중 국경선은 북한주민이 친 그물부표이다.
[춘천 의병마을]에서 교육부지원으로 학생들을 데리고 나라사랑 유적지 탐방을 다녀왔습니다.
블라디 보스톡~ 두만강, 압록강, 많은 곳을 찾아 다녔지만
대부분 관광객들은 전혀 찾지 않는 곳들이었습니다.
의미를 잊지 않으려는 누군가가 기념비를 세웠지만
풀도 자라고 초라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즘들어 더욱, 누군가는 끊임 없이 찾아와 헌화하고 풀을 뽑는듯 합니다.
대부분 어느정도 접근 가능한 곳이면 좀 정리되어 있고 헌화하는 사람도 가끔 보입니다.
소설 [토지]- 처참한 독립운동의 속살 자유시참변.
안중근의사의 거사 후 만주와 연해주, 상해등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납니다.
3.1운동도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저항하고 잡혀가 고문당하고 죽어갑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는, 그 말 보다 더 아픈 제 몸 깨기의 과정이죠
그런데 기적처럼 1920년 니항사건,봉오동,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자
일본군은 그 근거지인
간도에 사는 한국인들을 몰살합니다. 간도 참변입니다. ㅠㅠ
그냥 죽이고 짓밟을 목적으로 온 군인들의 행태가 어떠했겠습니까.?
북으로 이동한 독립군
그리고 러시아 볼쉐비키 혁명으로 등장한 적군 정부는 일본 제국주의를 견제할 목적으로
만주와 연해주에 무장 세력들을 모으기로 합니다.
자유시- 흑하사변
이르크츠파란 흑귀화인 중심 러시아 내 조선 공산당으로,
민족주의자 박 엘리야가 이끄는 사할린 부대와는 같은 귀화인이라도 앙숙이다.
사할린 부대는 1920년 니항사건 때 적군계 빨치산과 합세하여 일인을 전멸시킨 바 있다.이루크츠크파가 조선공화국이라는 것을 조직했으나 이동휘의 상해파와도 대립했었다.
1921년 혁명성공 후 레닌이 장차 있을 중,일 적화를 염두하고 구상한
원동혁명군에 조선 독립군을 모두 흡수하여 조선, 중국, 일본, 몽고의 혁명적 청년들을 훈련하자는 것이었다.당면 목표가 대일 전쟁이었으니 쫒기던 독립군이 노령으로 넘어간 건 당연했다.
. 그러나 군대를 집결해 놓고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사이에 주도권 쟁탈이 불 붙은 것이다.
살기등등한 속에서 우여곡절을 겪고 고려공산당 대회를 열었고,
이르크츠크파의 일방적 심사,
이동휘 불참 , 상해파는 참패. 사할린 부대가 이탈을 선언하고 독립군은 동요했다.
이때 일본의 압력으로 정세가 변해버린 러시아 혁명정부는 이미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결정하고 있었다
. … 무장 해제에 앞장선 것이 (사할린 부대와는 앙숙인) 이르크츠파의 자유대대였으니 피비린내 나는 참극이 일어났다. 사할린 부대는 대부분 살상되고, 박 엘리야와 대부분의 인솔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대일 독립전쟁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약소민족의 피눈물 나는 비극이었다.- 토지 중에서
이제 독립운동은 긴 여로이다. 독립의 희망은 멀고 자포자기의 분위기가 팽배해진 절망의 땅에서 젊은이들이 포기하지 않고 불씨를 이어가야 한다. 환국의 진학문제를 논하며 서희는
“너의 입에서 공부는 해서 뭘 하겠느냐 그런 말이 안 나오길 바란다. 안 하는 것은 쉽고 하는 것이 어려워. 사내는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할 것이다. 토지3부3권 15
ISBN13 9788982181290 ISBN10 8982181296
국가 없는 백성의 비참한 타국에서의 삶
국가없는 백성이 중국과 러시아 황무지를 일구는 삶은 그야말고 황야의 먹잇감 자체로 보인다. 중국의 마적단들, 일본군들에게 그들은 그저 힘없는 먹잇감일 뿐이었을 것이다. ㅠㅠ
중국 땅에서의 삶은 허무함이요. 참을 수 없는 비참함이다.
그 밟아죽일 놈들, 그 원수놈들이 연장을 마구 들내놓고서 댕기는 개쌍놈의 새끼들이 아 금매,” “시아부지 앞에서 며느리를 범하는디 그런 일들이 부지기수였다니, 젊은 사내는 보는 쪽쪽 작살내고 젊은 여인네는 보는 쪽쪽 겁탈 이라, 혀서 목 매어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차라리 흑룡강 너머 시베리아로 가는 게 살기 나을게요” - 토지 중에서
토지의 주요인물들은 모두 역사적 현실과 신분관계라는 비극적 운명에서 한의 얽힘이 시작된다. 고아로서 절에 있다가 중인 출신인 김개주의 강간의 결과물인 김환,
신분질서가 엄존한 사회에서 태어났고, 불행한 운명을 지녔기에 한이 쌓이지 않을 수 없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우고 깨달을수록 그 한은 커지는 법이다.
환은 자신의 한을 독립운동에 투신했지만 결국 허무한 죽음으로 끝나는 삶을 보인다.
‘…설움을 모른다면 어찌 마음이 있다 할 것인가.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라 할 수 없고 시궁창인들 어찌 더러울까…’
“그렇지마는 기쁜 것도 맘 아니것소?”
… 만물이 본시 혼자인데 기쁨이란 잠시 쉬어가는 고개요 슬픔만이 끝없는 길이네. 도요새가 짝을 만나 미치는 이치를 생각해 보아라. 외로움과 슬픔의 멍에를 쓰지 않았던들 그토록 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강줄기 같은 행로의 황홀한 꿈일 뿐이네. ..
어찌하여 대비라 하였는고. 공(空)이요 무(無)이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육신으로 진실로 빈자이니 쉬어갈 고개가 대자요 사랑이요 인이라.
쉬어갈 고개도 없는 저 안일지옥의 무리들이 어찌하여 사람이며 생명이겠는가 …
마음으로 육신으로 고통받는 자만이 누더기를 벗고 깨끗해질 것이며 뱃가죽에 비계 낀 저눈물없는 무리들이 언제 그 누더기를 벗을꼬. 고달픈 육신을 탓하지 마라, 고통의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지 마라. 우리가 어느날 어느 곳에서 만나게 된다면 우리 몸이 유리알 같이 맑아졌을 때일까…
후회라, 후회, 후회는 없겠구나, 내 생전에도 후회는 아니했으니, 한이야 지가 어디로 갔겠나… .. 한이야 후회하든 아니하든 원하든 원치 않든, 모르는 곳에서 생명과 더불어 내가 모르는 곳, 사람 모두가 알 수 없는 곳에서 온 생명의 응어리다. 밀쳐도 싸워도 끌어안고 울어도, 그것이 어디서 왔을꼬. 배고파서 외롭고, 헐벗어서 외롭고, 억울하여 외롭고, 병들고 늙고 황천길이 외롭고 … 그게 다 한이지 뭐겠나 . 생사가 모두 한이로다….토지 중에서
1909 이상설 안중근~1920 봉오동,청산리 까지
홀홀단신 만주로, 중국으로, 연해주로 달려간 수많은 독립 의사들이
드디어 군대를 만들고 총을 들어 싸우기 까지 .
이상설 유허비
우리가 찾아간 날도 누군가 여전히 풀도 뽑고 꽃도 바치고 하는 모습을 볼수 있었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 사행 이후 미주를 순방한 후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를 해외 독립운동기지로 삼고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여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신 분입니다.
1909년을 전후해서 연해주의병의 지도자들은 그 동안 각기 독자적인 의병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전력의 분산을 가져와 효과적인 항전을 벌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910년 6월 21일 편성된 것이 십삼도의군이고 선생은 여기서 외교통신원의 책임을 맡고 있었는데, 이 직책은 유인석과 이범윤 사이를 중재하면서 전체 사무와 조직을 관리하는 실질적 책임을 담당하셨죠.
선생을 비롯하여 십삼도의군의 중심 인물들인 유인석, 이범윤 등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게 되자, 일제는 러시아 당국에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주요인물들의 체포와 인도까지 요구하였다. 이로 인해 러시아 당국은 십삼도의군의 주요인물 42명을 체포하였으며, 이범윤 등은 중부시베리아의 이르쿠츠크로 , 선생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되었다가 1911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귀환합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다시 모인 연해주 지역의 인물들을모아 1911년 5월 권업회를 만듭니다. 창립 당시 회장에는 최재형, 부회장에는 홍범도가 선임되었죠.
안중근의사 단지동맹비
1909년 3월 2일, 노브키에프스크 가리(可里)에서 김기룡·엄인섭 등 12명의 동지가 모여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안중근·엄인섭은 침략의 원흉 이토[伊藤博文]를, 김태훈(金泰勳)은 이완용(李完用)의 암살 제거를 단지(斷指)의 피로써 맹세하고 3년 이내에 성사하지 못하면 자살로 국민에게 속죄하기로 한 단지동맹을 기념한 비입니다.
최재형 생가
나라없는 독립군들이 계란같은 자신의 몸으로 바위를 치기 위해서서는 피와 자금이 필요했죠.
15만엔을 탈취해서 무기구입하러 러시아 갔다가 허무하게 잡혀 처참하게 고문당하고 죽는 현실
북동방면에서 그 모든것은 거의 이분에게서 나왔습니다.
최재형은 1860년대 말 고려인 최초의 이민으로, 함경도 노비 출신이었다.그는 러시아 상선 선장의 도움으로 러시아 교육을 받은 최초의 고려인이기도 했다. 하급선원, 무기공장 노동자 등 각고의 고생 끝에 1900년대 초 제정 러시아와 일본 제국의 전쟁으로 인한 특수로 군수산업 분야에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서른이 되기 전에 연해주 굴지의 거부가 되었다
최재형은 저의 재산과 능력과 기회를 공동체에 바치며 고려인들의 존경을 받는 존재였다고 한다…..1907년 연해주로 건너온 안중근은 “집집마다 최재형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고 기억했다.
최재형은 물심양면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후원 및 독립운동 특히 무장투쟁의 정신적 지주이자 자금원으로 활약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척살 거사도 최재형의 후원이었다. (안중근의 권총도)
상해입시정부도다 한달 빠른 대한국민회의임시정부를 재정적으로 이끌었던 인물도 최재형이다. 그는 1920년 청산리 전투&봉오동 전투에 참여한 독립군들에게 러시아제 기관총 등 무기를 구입해 공급하며 승리를 견인하기도 했다.
봉오동 전투 유적지
많은 사람의 피와 돈으로 조금씩 뭉쳐진 독립군이….. 1920년 드디어 독립군 역사상 첫 승리를!!
지금은 웬일진지 양쪽 설명문을 덮어 놨더군요.ㅠㅠ
우리땅이 아니니 이유를 물어볼 곳도 없군요
댐이생겨 앞으로 일반인 접근이 어려워질 봉오동전투지가 저 안쪽 골짜기입니다
항일영웅 양세봉 장군
양세봉 장군은 자유시 참변 후 흩어진 독립군. 그 이후 독립운동을 주도하신 핵심인물입니다.
1930년대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으로 동북삼성의 장쉐량(장학량)의 당취오 부대와 제휴, 그 특무대로서 공동 작전을 폈죠. 그래서 요령 민중 자위군 특무 대 총사령이란 직함도 가지고 있던 분이고요
이때 독립군을 참살하는 사고를 치고 쫒겨다니던 김성주(김일성)일당이 찾아와 의지하고자 용서를 구했을때,
살려주고 받아준 분이기도 합니다. 얼마후 김일성은 지휘관자리를 얻지 못하자 사라졌다가 평양에 등장하죠.
30년대 독립군을 양성하며 전투를 이끈 분으로 조선 독립군 중 가장 유명한 분이나 우리에게는 잘 려지지 않았죠. 일제는 양세봉 총사령을 제거하기 위해 가장 많은 현상금을 걸었고, 밀정의 흉계에 빠져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집중사격을 받고 사망했답니다. 동지들이 산중턱에 평장한 것을 일제경찰이 다시 파헤쳐 시신의 목을 잘라서 효수했다고 합니다.
이후 중국정부? 조선족? 등이 잃어버린 항일 명장의 머리를 조각하여 이 흉상을 세웠다고합니다.
독립운동 유적지중 가장 규모가 컸지만
옥수수밭 사이로 제법 걸어들어가야 했어요
계단이 허물어지고.
옹벽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풀만 좀 뽑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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