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명장 린뱌오(임표)
45년 8월 18일 소련홍군은 15년 일본치하 동북3성을 해방시켜버렸다.
동북에 중공이 선수를 쳐 민주연군 10만명이 주둔했다. 국민당도 최정예 60만이 동북으로 집결했다. … 소련이 선양에 이어 장춘까지 국민당 측에 내주자 민주연군은 기습으로 장춘을 점령했다. 국민당군이 전면공세를 하자 린뱌오는 군대를 철수했다. 부하들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린뱌오는 병력을 농촌으로 분산시켰다.
…국민당 지휘관들의 민주연군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았다.
“공산당과 린뱌오의 부대가 고작 이정도라면….”
장세스는 무력으로 중공과의 모순을 해결하겠다고 결심했다.
치명적 오판이었다. 내전이 발발했다.
린뱌오는 77결의를 통과 시켰다.
“승패는 농민에게 달렸다.
도시에서 철수하라.
농민들이 공산당원의 품격을 살필 기회를 주자.
지위가 높을수록 너절한 일에 열중해야 한다. ”
민심이 공산당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병력도 20만으로 불었다. 2년만에 전세를 역선시켰다.
국민당군을 24개 도시에 몰아넣고 고립시켰다. 31시간만에 진저우 12만명을 섬멸했고 장군 43명을 포로로 잡았다.
병력도 230만을 증가했다….
린뱌오는 국공전쟁의 3대전역 중 2곳을 승리로 이끌었고
그가 지휘한 제4야전군은 동북 전체를 해방시켰고,
텐진을 점령해 베이징을 고립시킨후 무혈입성했다.
여세를 몰아 광둥등 6개 성을 해방시킨후 하이난다오까지 평정했다
중국 역사상 이런 부대는 없었다.
스탈린은 그를 전쟁의 천재라 불렀고
장제스는 전쟁마귀라 불렀다.
그가 없었다면 중국공산당은 전멸했을것입니다.
그러나 린뱌오는 “한밤의 외로운 학처럼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실제로 공산정권 수립 후 외부와 단절된 생활을 했다. 원수 계급장 받는 날도 아프다며 나가지 않았다.
산수화만 봐도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물을 무서워했다. 빛도 무서워해서, 빛을 차단시킨 방에 혼자 있기를 좋아했다. 집무실도 없었다. 운동, 등산은 원래 싫어했고, 사냥 낚시는 할 줄도 몰랐지만 물을 무서워했으므로 할 수 도 없었다.
아는 노래는 하나도 없었다. TV, 신문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의학사전과 지구의 보는 게 취미였다. 항상 환자였다. 83
이 이야기는 바로 다음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갔더니 명장 린뱌오는 없고 어설펐던 장군 펑더화이 조각상만 여기저기 있더군요
린뱌오에 비하면 펑더화이는 유치하죠
린뱌오는 이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합니다. 마오에게도 껄끄러운 명장이었겠죠
김명호 교수의 진짜 [중국인 이야기1] 소개합니다.
ISBN : 978-89-88404-00-3 (07860)
40년간 중국을 ‘놀이터’ 삼아 책·잡지·새벽시장·식당 등을 섭렵한 김명호 라지만 ‘중국인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의구심이 든다. 중국인이 아니고서야 이토록 심도 있게 중국의 내면을 파헤치는 작업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뛰어 넘었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중국인 이야기’는 일기나 편지, 회고록 등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연대기가 아닌 인물열전 형식으로 중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한다. 중국 역사를 이끈 인물들의 목소리는 물론 이들의 얽히고설킨 인간관계가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1권에서는 혁명의 주체인 류와 마오,린뱌오, 장제스 등을 중심으로 그리지만, 최근 나온 ‘중국인 이야기 3권’은 장제스의 아들이자 대만의 총통을 지낸 장징궈(蔣經國), 중국 공산당주의운동의 창시자인 천두슈(陳獨秀), 대만 국민당의 원로이자 사랑받는 청백리였던 위유런(于右任), 중국 교육부장관이자 베이징대 총장이었던 장멍린(蔣夢麟) 등을 다룬다. 또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 삼형제의 숨겨진 불화도 그려진다.
예를 들어 장징궈를 말할 때는 우리의 예상을 넘어 힘을 주기도 한다. 그는
“대륙 지식인들이 시진핑에게 대만의 장징궈와 같은 역할을 기대한다고 말할 정도도 대륙도 그를 높이 평가했다. 장징궈가 대륙에 있었다면 총서기가 됐을 것이라고도 한다”며 “그를 장제스의 아들로만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오쩌둥(毛澤東)의 부인이자 문화대혁명을 이끌었던 장칭(江靑)을 그릴때도 흥미진진하다. “장칭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 제각각입니다. 장칭만큼 겸손한 사람은 없었다고도 하고, 아주 표독스럽고 변덕스러웠다는 평도 있지요. 그녀는 베이징도서관에서 책을 가장 많이 빌린 여성인 동시에 예능적으로 매우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장칭, 린뱌오(林彪), 장쉐량(張學良) 같이 비극적 생애를 산 인물들에게 흥미가 가요. 이 사람들의 삶은 정의를 내리기 어렵거든요.”
툭툭 끊어지는 단문과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구어체도 책의 특징 중 하나다. 김명호는 “늘여 쓴다는 것은 누구를 가르치려는 것뿐이다. 그래서 불필요한 것은 잘라버린다. 동양화의 여백처럼 독자가 직접 상상해서 채워넣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명호는 “한국과 중국은 인접해있고, 역사적으로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을 잘 안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중국인은 한국인과 많이 다르다. 이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들은 중국이 북한의 자원을 노리고 관계를 유지한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오해일 뿐이라고 했다. 중국은 남의 나랏일에 절대 간섭하지 않는다며 중국이 우리 남북문제 해결에 나서주길 원하는 것은 쓸데없는 바람일 뿐이다고 일축했다.
중국 역사의 순간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진은 책의 또 다른 매력이다. 놀랍게도 책에 실린 모든 사진은 김명호가 중국, 홍콩, 대만 등의 골동품 가게를 돌며 직접 모은 것들이다. 그 수만 1만점이 넘어간다. 팩트(fact)에 기반한 객관적 서술은 ‘중국인 이야기’의 가장 큰 힘이다.
[연합뉴스 2014-05-12‘저자와의 만남’을 요약 편집.]
한국에서 중국인을 이해하는 것이 가능한가?
2차 대전 이후 세계는 이념이라는 거대한 장벽을 세우고 둘로 나뉘어 서로를 백안시 했다. 때문에 폐쇄적인 국사정권하의 한국에서 장벽 저쪽에 있는 중국이라는 나라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았다. 70년대 군사독재정권하에서 중국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까지 했다.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고 최대 무역 상대국이 된 지금까지도 우리는 중국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할 뿐 아니라 함부로 탐구하기가 껄끄러운 것이 현실이다.
몇 권의 문학 서적이 그 목마름을 해결해 줄 뿐이었다.
펄벅의 『대지』가 1900년대 중국 농민의 삶의 애환을 처음으로 그렸다면, 장 융의 자전소설 『대륙의 딸들』은 군벌시대로부터 문화혁명까지의 3대에 걸친 역사를 보여준다. 1900년부터 100년간에 근현대사를 다룬 이 책은 가히 금세기 최고의 중국 논픽션으로 알려져 있다. 대장정과 문화혁명의 디테일한 결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은 사건의 소용돌이 안에서 함께 휘둘리며 살아간 사람들의 보고서일 뿐이다. 중국사회에 일어난 사건들을 원인과 결과를 맞춰가며 입체적으로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함부로 중국이야기를 다룰 수 없었던 군사정권 하의 우리나라에서는 리영희의 [5억인과의 대화]등과 같이 기 출판 사료들을 엮어 중국을 설명하는 정도의 책들 밖에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드디어 한국에서도 중국의 군벌시대부터 홍군의 혁명을 거쳐 대장정과 국공합작, 공산당정권의 수립과 문화혁명은 물론, 국민당의 타이완행과 마오쩌뚱 이후 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수용까지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책이 등장했다.
김명호의 [중국인 이야기]는 중국 땅에 산 인민들의 삶이 어떠했는지, 혁명의 주체들이 어떻게 일어나서 인민들에게 다가갔는지, 홍군이 어떻게 오늘날의 중국 공산당이 되어, 어떻게 중국의 정치체제가 정립되고 오늘날에 이르렀는지, 어떤 사건들이 있었고 거기에 누가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중국 근 현대사를 살아온 생생한 삶의 모습들을 소개하며 수많은 중국인들의 삶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의 역사를 보여준다.
이제 이 책을 읽으면 중국의 근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다.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보고 로마를 이해한 독자라면 이제 [중국인 이야기]를 읽으면 로마보다도 중국이 더 생생해 질 것이다. 더구나 [중국인 이야기]는 재미있기까지 하다. 로마인 이야기처럼 시대를 따라 긴장되었다 늘어지거나 하지도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서 펄떡거리는 사람의 이야기, 삶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중국인 이야기 1]
꽤 두꺼운 책이니 한구절만 소개합니다.
1) 류는 마오의 속마음을 읽지 못했다.
자본주의 착취는 봉건 착취보다 진보적이다. 착취자는 없는 것보다 있는 편이 좋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자본가가 공장문을 열기 원한다. 착취당해야 실업을 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는 공산을 바라지 않는다. …공장을 늘리고 전력을 다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봉급을 주고 착취하라. 국가는 사회생산력제고에 애쓴 공로를 잊지 않겠다.-류사오치27
덩샤오핑은 ‘적과의 모순은 끝났다. 가장 중요한 모순은 낙후된 생산력과 그 수요가 증가하는 인민의 물질문화간의 모순’이라며 대놓고 류사오치의 정책을 지지했다. 경제보다 계급투쟁이 먼저라는 마오쩌뚱의 주장에 배치된다.
58년 전국민 1.070만톤 철강생산, 인민공사설립의 대약진운동은 후류쇼프가 “방구한번 시원하게 끼려다 바지에 똥을 쌌다”고 빈정댄 실험이다. 3년간의 기근이 겹치면서 완전히 실패했다. 인구 4천만이 줄었다. 마오쩌뚱의 정책적 실패였다. 류사오치는 좌경화를 비판했다.“ 하늘의 재앙은 30% 나머지는 인간의 탓” 마오에 대한 완곡한 비판이다. 34
어린애가 대학에 가기까지 생산을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소요되는 물질과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학비다. … 모든 문제는 마오주석의 지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린뱌오 36
대약진운동의 실패로 마오의 체면에 금이 갔다. 류와 덩의 중공중앙당은 경제문제에 주력했다. 3년만에 변화가 나타났지만 마오의 생각은 달랐다. 정권안정은 물론이고 인간과 사회를 개조하려면 계급투쟁이 유일했다. 먹고사는 문제는 언제고 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 군대를 장악하고 계급투쟁의 중요성을 각인시킨 후 개인숭배에 두 팔을 걷어 붙였다. 저우앤라이를 통해 군구를 재정비하고 국구사령관의 지위권을 박탈했다. 마오의 중앙군사위원회가 전군의 지휘권을 장악해 버렸다. 62년 죽은 레이펑의 일기를 보고 “레이펑 배우기 운동”을 통해 개인숭배의 광풍을 일으켰다. 62년 전당대회에서 “하루도 계급투쟁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살기가 가득했다. …
지식은 존중했지만 지식인은 무시했다. “거지근성강하고, 고마워할 줄 모르고, 핑계대고, 잘난척하고 무책임하다” 5.16 통지를 통과 시켰다. “당,정부,군대,문화계 할 것 없이 모든 영역에 자산계급이 섞여있다. 이들을 쓸어버려야 한다.” 문혁이 시작되자 ‘북경시와 대학이 문혁을 저지하려한다. 이들을 타도하고 마오 주석을 보호하자’는 대자보가 연일 보도되자 학생들의 흥분은 극에 달했고 홍위병 완장을 차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교수 60여명을 끌어내 몽둥이 찜질을 퍼부었다. 광기의 시작이었다. 베이징 55개 대학과 100개 중학교에서 연일 참극이 벌어졌다. p43 “참극은 류,덩의 당 중앙과 마오,린뱌오 간 벌어진 대리전이다.“ p47
칭화대 조반파 영수가 “반혁명 수정주의 두목 류사오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들고 나왔다. 든든한 구석이 없으면 불가능한 구호였다. 홍위병들이 류의 중난하이를 포위하고 밤낮없이 꽹과리를 두드리며 외쳐댔다. 잠자는 시간이라도 이를 중지시키려는 경호원들을 마오가 제지했다. “내버려 둬라 난 조용한 것 보다 시끄러운게 좋다. 새로운 것이 탄생할 때는 시끄러운 법이다. ”
중난하이 조반파들이 류의집에 들이닥쳤다. 처음엔 멈칫했지만 이럴 때일수록 숨은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꼭 있게 마련이다. 평소 얌전하던 청소부가 여덟가지 죄목을 열거하며 답변을 요구했다. 류의 멱살을 잡고 왕광메이의 머리채를 흔들었다. 명색이 국가주석이었지만 신화가 깨지는 건 순간이었다.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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