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NJI8cz6tuKg
지금으로부터 딱 100년전 오늘 삼일독립운동이 “대한독립만세!!” 라는 외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날 탑골공원에 모인 사람들 앞에 처음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우연히 독립선언서를 인쇄물을 전달하던 시골 교회학교 교사 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원래 계획은 33인 민족대표자가 직접 이날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로 되어 있었죠. 하지만 이들은 하루 전, 충돌을 우려하여 급히 계획을 수정, 탑골공원이 아닌 태화관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자진해서 경찰서에 연락하고 남산에 있는 경무통감부에 수감됐다.
이날 1시부터 탑골공원에 모이기 시작한 시민과 학생들은 점점 불어 5천여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민족대표인 손병희 씨는 시간이 다 되도록 끝내 나타나지 않았죠.
그런데 갑자기 한 젊은 청년이 단상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기 시작했죠. 그가 바로 25살 정재용씨 입니다.
조선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10일 육당 최남선이 작성
인쇄는 천도교의 인쇄기관인 보성사에서 25일 깊은 밤에 2만여장을 인쇄하여,
26일 아침부터 기독교측, 천도교측이 각 지방교회, 지방교구로 발송하였다.
전도사 김충근은 정재용에게 28일 아침 감리교 중앙예배당 전도실에서 원산교회로 보내는 선언서 100여장을 부탁한다. 정재용은 그 중 1장을 자기호주머니 속에 넣고 나머지는 서울역에 가서 원산교회 전도사 방영회에게 건네주고 돌아왔다.
하오 8시경 이교갑 주선으로 정동예배당 정원에서 명일 3월 1일 독립선언할 민족 대표자회의에 참석할 박희도 등과 악수 환송할 때, 후사를 부탁한다는 말을 듣는다.
아침 일찍 박희도에게 안타까운 소식을 듣게 됩니다.
고종 황제를 독살설로 군중들이 극도로 흥분하여 민족대표가 탑동공원에 가서 학생, 군중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 유혈이 많이 날 것 같다는 논의 끝에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다는 것이었죠.
이 말을 들을 때 내 생각에 민족적 자활에 관계가 되는 중대 인류거사의 기회를 놓아 보내지 않아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면서 ,이규갑,최두현,노성현동지들과 탑동공원 정자에 올라서본즉, 지방에서 인산 배관하러 온 노인 십여분이 눈에 띌 뿐이었다. 그런데 하오 2시경 공원 북동문으로 탑을 중심하여 삽시간에 수 천명 학생, 군중이 입추의 여지도 없이 들어서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이를 본 나는 천재일우의 조선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기회가 나에게 왔구나 하는 생각에 호주머니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집어내자 두 손으로 활짝 펴들고 조선독립선언서하고 외쳤다. 이를 들은 학생, 군중들은 우와, 우와 하는 함성과 함께 학생들의 모자가 공중으로 날아 오르며 발로 땅을 구르는 소리는 지축을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유유히 공약 3장까지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군중이 합창했다. 이 감격스러울 때 한 청년이 불쑥나와 내가 낭독한 선언서를 달래서 품에 품고 단장을 높이 쳐들고 독립만세의 시가행진의 선두에 서서 미,불 영사관을 향해서 나갔다. 이것을 계기로 독립운동은 그대로 전국 방방곡곡, 조직을 통하여 노도와 같이 휩쓸었다.
정재용은 이로 인해 일경에 체포되어 2년 6개월의 형을 받았다. 출소 후 정재용은 고향인 황해도 해주로 돌아가 창의학교와 본정통감리교회의 목회 활동을 하다가 월남, 1976년에 사망하였고, 1990년에서야 비로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삼각산 백운대 꼭대기 위에 독립선언문은 기미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자신이 독립선언만세를 도창했다는 정재용의 글이 새겨져 있는 바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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