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산 쌍계사 대웅전은 무척 크게 보인다. 주변에 건물들이 없어서 더 크게 보이는지도 모르겠다. 대웅전은 계곡 사이에 서 있었다. 들어오는 문에 왜 산이름이 없었나 했는데 이해가 가는 듯 싶었다.
통상 대웅전 뒤에는 산이 있는 경우가 많다. 일주문에도 절이름앞에 산이름을 붙인다. 그런데 일주문 역할을 하는 2층 누각 현판에는 산이름없디 쌍계사라고만 씌여져 있다. 처음에는 그냥 수준이 낮구만 하고 생각을 했다. 그런데 절에 들어와 보니 대웅전 뒤에 산이 없었다.
쌍계사 대웅전은 산의 위용을 빌리지 않고도 충분히 웅장했고 거대했다. 그래서 자신있게 일주문에다 절이름만 썼는지 모르겠다. 산의 위용을 빌리지 않으려니 대웅전은 그 자체만으로 웅장해야 했다. 무엇이 대웅전을 그렇게 보이게 하는지 궁금했다.
그 큰 대웅전에 주눅이 들었다. 넓기도 넓었고 높기도 높았다. 기초부분을 쌓아 놓은 단이 그리 높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내눈 앞의 대웅전은 아주 거대한 산과 같이 보였다. 마치 거인을 앞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천천히 걸어서 다가갔다.
대웅전을 한바퀴 돌아 보았다. 그러다가 언뜻 무엇이 대웅전을 이렇게 웅장하게 보이게 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자연미와 인공미의 조화였다. 건축은 인공의 예술이다. 인간의 손과 노력이 많이 개입하면 할수록 건축학적으로는 의미가 있는 법이다. 그냥 자연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건축이라고도 할 수 없는 법이다.
대웅전은 기둥과 초석이 자연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고 기둥위 처마부터 지붕까지는 인공미를 담고 있었다. 우선 기둥은 손보지 않은 나무인 듯 했다. 그리고 다른 대웅전의 기둥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두꺼웠다. 이렇게 두툼한 기둥을 만든 이유는 지붕이 무겁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대웅전 건물이 크다보니 그 무게를 지탱하기 위한 기둥도 두꺼워야 한다.
대웅전을 떠 받치고 있는 기둥들은 나무가 살아 있을때와 같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기둥들은 민흘림이나 배흘림 모양이었다. 그런데 임진왜란때 불타고 나서 다시 지은 절들은 대부분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배흘림이나 민흘림 기둥을 만들기 위한 나무들이 그리 마땅치 않아서 인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에 궁궐의 기둥이 되었던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을 너무 많이 베어서 모두 멸종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이후 새로 전각을 지으려 했는데 그만한 나무를 구하기 어려워 아마도 자연 상태의 나무를 그냥 사용한 것 같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듬지 않은 나무기둥들이 훨씬 멋있어 졌다. 아무리 인공적으로 다듬는다 하더라도 자연그대로의 모습보다는 못한 법인 듯 했다. 나무기둥들을 받치고 있는 초석들도 자연미를 한껏 내뿜고 있었다. 우리 전통건축에 댕그리 기법이라는 것이 있다. 자연 상태의 초석에 나무기둥의 밑을 칼로 다음어서 세우는 것이다. 울퉁불퉁한 초석의 모습을 기둥밑바닥을 파서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댕그리 기법으로 초석위에 기둥을 세우면 웬만해서는 건물이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신라시대의 궁궐터나 고려시대의 건물들을 보면 대부분 초석의 윗면을 평평하게 잘 다듬어 놓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건물 기둥들은 울퉁불퉁한 초석위에 그대로 세워 놓았다. 지진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한다. 순전히 감과 눈대중으로 기둥의 밑을 잘 파서 초석위에 올려야 한다. 쌍계사 대웅전의 기둥들은 댕그리 기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렇게 무거운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기에 다포식으로 공포를 쌓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다포의 화려함은 인공미이다. 그 인공미는 다듬지 않은 자연스런 나무 기둥위에서 비로소 그 아름다움을 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연꽃과 용 등 각양각색의 모습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공포를 구경하느라고 하늘을 보면서 다시 한바퀴 돌았다. 구석 구석 마다 용의 모습들이 보인다. 물을 관장한다는 용을 많이 만든 것은 절이 불에 타지 말라는 염원을 담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대웅전 안을 들여다 보았다. 조금은 어두운 분위기였다. 세분의 부처님이 계시고 그 위에 닫집이 있었다. 부처님 상 위에는 지붕모양의 장식이 있다. 그것을 닫집이라고 한다. 그 닫집안에 자세히 보면 용들이 있고 주변에 새가 있다. 제일 처음에는 기러기인줄 알았다. 새발이 크게 만들어져 있어서 물칼퀴인줄 알았다. 기러기가 아니라 학이라고 한다. 천상과 지상을 오가며 소식을 전해주는 전령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한다.
대웅전 전면의 창문의 창살을 살펴보았다. 이제까지 보았던 창살무늬 중 최고의 수준이었다. 연꽃을 비롯한 다양한 문양들이 창살을 꾸미고 있었다. 특히 정면에 열린 창살의 무늬를 대웅전 옆문에서 바라보았을 때의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대웅전 내부의 어두움을 넘어서 보이는 정면의 창살을 입체감까지 느껴졌다.
창살무늬의 은은한 색감에 취해 대웅전에 들어가 않았다.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열린 문사이로 들어오는 미풍이 나를 휘돌아 감싸고 지나갔다.
조선후기 대웅전 중에서 최고의 걸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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