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덩케르크를 보고(이것도 좀 까칠합니다)

image

낮에 사촌 동생을 만나 한양도성을 같이 걸었다. 영화 덩케르크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괜찮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리고는 히틀러가 일부러 공격을 안한거 아니냐고 묻는다. 난 히틀러가 덩케르크에서 3일간 독일군의 진격을 멈추게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 최대의 미스테리라고 답했다. 내 사촌동생은 머리가 좋기로 이름난 친구다. 역시 머리 좋은 사람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다.
만일 히틀러가 독일군의 진격을 중지시키지 않았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재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국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영화에서는 마치 프랑스군이 외곽을 간신히 방어하고 영국 공군이 독일 공군의 공격을 막아내서 덩케르크에서 철수를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것으로 그리고 있지만 그것은 완전히 역사왜곡이다.

영국군이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히틀러의 잘못때문이었다. 그것은 세계사의 수수께끼다.
왜 히틀러가 공격을 계속해서 영국과 프랑스군을 소탕하지 않았는가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소설과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누구도 히틀러가 왜 그러했는지를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독일의 역사를 통해서 유추해보자면 내생각은 다음과 같다.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를 완전히 패배시켜서 무너뜨리고자 하는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일은 프러시아 당시부터 보오전쟁과 보불전쟁 그리고 제1차 셰계대전을 치른다.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명재상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군이 패배해서 철수할 수 있도록 여유를 준다. 프로이센군 총참모총장 몰트케를 위시한 군인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의 체면을 지켜준다. 그 이후 보불전쟁에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으로부터 받은 운혜에 보답한다. 보불전쟁이 벌어졌을때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의 배후를 치지않았다. 그러나 보불전쟁에서 군인 몰트케는 완벽한 군사적 승리를 주장한다. 결국 빌헬름 황제는 독일황제의 대관식을 프랑스에서 올리면서 프랑스인들의 자존심에 먹칠을 했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고 독일이 패배하자 프랑스는 독일에게 가혹한 항복조건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필자는 히틀러가 몰트케가 아닌 비스마르크가 되고자 했다고 생각한다.
히틀러는 애시당초 영국과 프랑스를 적으로 돌리려는 생각을하지 않았다. 폴란드 침공이후 오랜기간동안 말로만인 전쟁을 한 것도 그런 이유다. 히틀러는 자신의 적을 소련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극우주의인 나찌가 극좌인 볼세비키를 적으로 보는 것은 당연했다. 히틀러는 소련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과의 전쟁을 위해 프랑스와 영국을 철천지 원수로 만들지 않아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프랑스를 점령한 히틀러가 비록 괴뢰이지만 비시정권을 수립하고 프랑스 지역 전체를 정복하지 않았던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닌가 한다.
히틀러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과 일전을 위해 자본주의 국가인 프랑스와 영국의 암묵적 지원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많은 역사학자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다.

제2차세계대전 진행과정에서 영국의 처칠은 독일과 소련이 서로 죽을 때 까지 싸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고려해보면 히틀러의 이런 판단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 문제는 매우 복잡한 문제니 이정도로 정리하도록 하겠다. 이정도만 이해해도 영화 덩케르크를 보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저녁에 집에와서 있는데 딸아이들이 덩케르크가 재미있었다고 한다. 내가 한번 보아야 하겠다고 했더니 지금 한번 더 보자고 한다. 그래서 따라 나섰다. 딸아이들이 두번이나 보겠다는 것을 보니 상당히 잘만들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은 영하를 보면서 천안함과 세월호 생각이 나서 눈물이 났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다. 덩케르크에서 왜 그런 이야기들이 나올까? 하고 생각했다. 첨 영화제목을 덩케르크라고 한 것이 좀 어색했다는 점을 미리 짚어두어야 겠다. 우리나라 역사책에는 모두 던커어크라고 나온다. 덩케르크라고 발음하는 것이 뭔가 어색했다. 그런데 현지 발음이 던커어크가 아니고 덩케르크라고 한단다. 혼란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이 왜 이 영화를 두번씩이나 보려고 했을까? 난 감독이 이 영화를 왜 만들었을까가 궁금했다. 앞에서 말한 것 처럼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일까? 큰 딸은 이 영화의 의미는 생존이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이야기 한다. “생존은 공포이자 탐욕이고 본응을 농락하는 운명의 장난이지” 어선에 숨어서 탈출을 기다리던 병사들이 배를 물에 뜨게 하려면 무게를 줄여야 한다면 영국군 깁슨으로 위장한 프랑스 군을 쫓아 내려는 장면에서 나온 대사다. 감독이 영화에서 이 말을 하고 싶었다는 것이다. 난 급박한 장면에서 이런 문학적 대사를 읆조리는 것이 정말로 천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대사는 관객이 그냥 느낄 수 있어야지 그냥 배우가 말을 하면 어떻게 하나? 그건 3류 아닌가 생각한다. 딸아이는 자신도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그런 이유로 싫어하는 바이나, 이번의 경우는 상황에 부합한다며 나의 평가를 반박한다. 딸아이의 반박에도 불구하고 난 감독이 관객들에게 그런 주제를 강요했다는 점에서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내 생각에 영화는 전반적으로 수준이하였다. 생존에 대한 기묘한 비틀림과 영웅주의를 뒤섞어서 뭐가 뭔지를 모르게 만들어버렸다. 마치 섞어찌개를 먹는 기분이다. 만일 삶과 죽은 그리고 생존의 욕망을 표현하고 싶었다면 그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선장이야기까지는 그럭 저력 참을만 했다. 그러나 영국 공군의 영웅주의는 영화를 완전히 3류로 만들어 버렸다. 전쟁영화에서 영웅적인 분투는 약방의 감초이다. 감독이 그런 부분을 도외시 할 수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감독은 연료가 떨어져서 돌아가기 어려울 수 있는 상황에서 귀환을 포기하고 독일군 폭격기를 공격하려고 할때 조종사의 표정에서 드러난 삶과 죽음의 선택의 문제를 그리려고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전쟁 영웅주의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려는 장치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의 주제를 일관하게 만들지는 못한 것 같다. 영화의 전반적인 구조가 뒤틀려 있는데 배우의 연기만으로 주제를 이어간다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이다. 영화말미에 처칠의 덩케르크의 철수가 승리라고 하는 부분을 강조한 것은 누구 말처럼 영국의 국뽕 영화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물론 영화의 겪을 한번 더 떨어 트렸다.

좋은 소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영국군 깁슨으로 위장했다가 마지막에 어선에서 배를 버리고 나오라는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해 죽은 프랑스 병사의 이야기는 매우 의미있는 주제꺼리 였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한 에피소드로 절하시키고 말았다. 과연 세계적인 감독이 만든 영화인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딸아이들은 독일군의 폭격기 공격으로 폭파되어 침롤하는 영국군 함선을 보면서 천안함과 세월호를 떠올렸다고 한다. 인간은 경험으로 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난 아이들이 천안함과 세월호 사건으로 그렇게 엄청난 심리적 상처를 받았는지 몰랐다. 딸아이들이 영화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주제에 환호를 하는 것인지 그리고 그 멧세지에 감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딸아이들의 평가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집에 들어오니 새벽 2시이다. 누워서 잠을 청했으나 영화 보면서 마신 커피 때문이지 잠이 오지 않는다. 불면의 새벽을 보내고 있다. 누워서 잠못자고 있는 것 보다 이렇게 영화평이라도 쓰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이영화를 보려고 내가 불면의 새벽을 헌납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영화평을 마친다.


This page is synchronized from the post: ‘영화 덩케르크를 보고(이것도 좀 까칠합니다)’

Your browser is out-of-date!

Update your browser to view this website correctly. Update my browser now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