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란 무엇일까?
좋은 시인이란 누구일까?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다.
무림의 정파와 사파처럼
누군가는 정형화된 시를 쓰고
누군가는 자유분방한 시를 쓴다.
보통 전자는 전통매체 공교육 교과서에서 많이 보이고,
후자는 비전통매체 인터넷, 엘레베이터벽, 놀이터 의자 등에서도 발견된다.
그러나 무림의 초고수들처럼
결국 극과 극은 만나게 되고 통하게 된다.
세상과 단체와 타인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허물고
죽마고우처럼 궁극의 ‘무’에 대해 순수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교제한다.
그렇다면 궁극의 ‘시’란 무엇일까 질문해본다.
좋은 ‘시’의 미덕과 지향점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난 ‘진실’과 ‘재치’라 생각한다.
표현하고자한 현상을 감정을 관계를
가감없이 진실되게 표현해야 언제든 내가 쓴 시에
“그땐 참 그랬지~” 라며 미소지을 수 있다.
그것이 창작자 본인을 행복하게 하고,
타인 또한 행복하게할 좋은 시일 것이다.
좀 더 나아가
진실을 전달하는 도구로, 형식으로
의미전달을 위해
의도적인 기교가 재치있게 곁들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기교가 진실을 앞서게 되면 훗날
창작자가 느낄 것은 진실보단 기교가 앞선
자신의 속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미소보단 쓴 웃음이 날 것이다.
그래서 현란한 미사여구 보단 진실성이 확보된 ‘시’가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고,
적더라도 더 깊게 사랑받을 수 있는 좋은 시라 생각한다.
그렇다면 결국 좋은 ‘시’란
우선 창작자 본인에게 진실성이 인정되야 하고,
제3자에게도 진실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그래야지 시가 전달력이 있고, 감동이 있고, 여운이 있을 것이다.
그러면에서 오늘은 평소 좋은 시에 대한 내 생각을 강화시켜준 한 편의 시를 소개하고 싶다.
현란한 미사 여구는 없지만
내게 진실성이 확보된, 진실이 재치있게 표현된 아주 좋은 ‘시’ 다.
울보 담임 (김동진)
담임은 울보다
우리가 쪼금만 잘못해도 운다
다른 선생님 시간에 떠들어도 운다
대들다가 울면 우리만 불리해진다
내일도 담임은 울 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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